나는 평소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어제 먹은 걸 또 먹어도 불평이 없다. 맛집 추천도 어려운데, 메뉴를 직접 정해야 하는 집밥은 더 어렵다. 스무 살 된 첫째는 내가 “맛없다”고 하면 “엄마도 맛없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맛이 없는 거냐”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도 남편과 아이들은 매끼 새로운 메뉴를 원한다. 나름 열심히 짜장밥을 준비했는데, 급식에서 먹었다며 안 먹는 아이나 점심에 짜장면을 먹었다며 외면하는 남편을 보면 정말 얄미워서 파업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작년에는 큰아이가 고등학생, 둘째가 중학생, 막내가 초등학생이어서 귀가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남편 식사까지 합치면 하루에 저녁을 네 번 차릴 때도 있었다. 결혼 생활과 육아 경력 20년이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밥은 내 인생 최대의 과제이자 평생의 고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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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어른들은 뭐든 잘하는 줄 알았다.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을 하며, 뚝딱 밥상을 차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었지만, 저절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이나 후나 난 변함없었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아이들 반응에 늦어 서운하게 하거나, 등교할 때 물통 챙기는 걸 잊기도 했다. 때론 무기력하게 아이들을 방관하기도 했다. 감정이 폭발하면 맹수처럼 변하기도 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막내가 세 살일 때까지 직장에 다녔는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소풍 버스 배웅 한 번을 못 갔다. 큰아이는 그때 서운했던 기억을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했던 후회와 반성을 기록했다면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았을 거다. 당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보지만, 여전히 부족한 엄마라고 느낀다. 남편 또한 장점이 많지만, 내가 생각했던 성숙한 어른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가 되기에는 아직 덜 성장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매일매일 자랐다. 아니, 아이들이 부모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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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모범생이었다면
아이들이 소위 모범생 타입이었다면, 난 내가 잘 키워서 그렇다고 교만했을 거다. 어깨에 힘주고 으스대며 그렇지 못한 부모들을 섣불리 판단했겠지. 똑똑하고, 품행도 단정하고, 행복하기까지 한 아이. 큰아이 유아기 때는 아주 잠깐 그런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보낸 후 온갖 평지풍파를 겪으며 나는 많이 무너지고 깎여 나갔다. 그 과정에서 겸손을 배웠고, 다른 집 아이와 부모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일들을 밖으로 꺼내기엔 아직 용기가 없다. 시간이 지나 풀어낸다면 아마 ‘결혼지옥’이나 ‘금쪽이’ 같은 장르가 될 거다. 지금도 마음 아파하는 아이와 그 부모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리다. 아이들은 부모뿐 아니라 주변 어른, 자연, 환경이 모두 키우고 있었고, 그걸 부모가 일일이 관여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부모의 역할이 크지만, 그 역할조차도 신께 기도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아이를 바구니에 눕혀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심정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훗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들었던 신성욱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더욱 명확해졌고, 아이와 마주 바라보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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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육아와 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2013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후원회원이 되어 올해로 13년째 함께하고 있다. 후원회원이 된 지 3년 뒤에는 지역에 있는 ‘고래이야기 작은도서관’에서도 활동하며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그동안 단체에서 만난 여러 강의, 책, 사람들은 경쟁 교육 속에서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지키고 좀 더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큰아이는 저학년 때 직장 다니는 엄마를 대신할 돌봄이 필요해 태권도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초등 5학년 때까지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그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이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배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집에서 영어책이라도 읽히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가 “엄마가 딴 사람 같아진다”고 해서 포기했었다.
단, 내가 활동하는 ‘고래이야기 작은도서관’의 학년별 독서 동아리는 참여하고 있었다. 이 독서 동아리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들은 백화현 선생님의 강의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곳은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교환의 관계가 아닌 아이들과 아이들을 둘러싼 부모들로 구성되는 공동체의 관계였다. 아이들은 독서 동아리로 모이고 부모 또한 독서 모임을 하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건강한 성장을 함께 이야기했다. 특히 아이들을 주로 이끌어 줬던 도서관 운영위원 친구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따뜻했다. 주변에서는 중학교부터는 수학이 중요하니 영어를 초등학교 때 해 둬야 한다는 잔소리를 은연중에 들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아이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먼저였다. 독서 동아리는 그런 마음 주머니를 채우는 큰 역할을 했다. |
6학년이 되기 전 방학, 큰아이와 남편이 미얀마에 갔을 때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 시내 쇼핑몰에서 각자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것저것 보다가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는데, 플레이스테이션 매장에서 진열된 PS4를 떨어뜨려 파손시켰다. 주변에 어른은 없고, 말은 통하지 않아 10분 동안 붙잡혀 있었다. 함께 간 또래 형 중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도 있어 그 아이들과 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혼자 떨어져 있으니 대처 능력이 없었던 거다. 어른을 찾아오겠다고 한국어로 말해 봤자 점원은 알아들을 수 없었을 테고. 점원은 “Wait, wait”만 반복하며 아이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일행 중 영어가 유창한 한 명이 나타나 망가진 PS4 대신 고가의 헤드폰을 사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집에 돌아온 며칠 후, 아이는 자기에게 영어 공부가 필요하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먼저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오히려 매일 학원에 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그래도 자기는 공부해서 그 형들처럼 영어를 잘하고 싶단다. 좋은 학원을 찾아 공부를 시작하고, 매일 성실히 노력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들은 편해문 선생님의 강의 중 ‘아이들은 외부에서 제공되는 배움과 내부로부터 오는 성장 에너지로 자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의 내적 동기가 스스로를 움직이게 한 거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아이도 나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아이는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고 성취감을 느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하며 아이의 미래를 막연하게 불안해하지 않고, 공부의 목적을 좋은 성적에 두지 않는 태도가 내 안에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보다는 나와 아이의 관계를 우선하고, 아이가 지금 무엇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있는지에 집중했다. |
아이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자신의 성장에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시도해 왔다. 목표를 세우면 그게 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 살 때도 작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해 줘, 해 줘'를 반복했다. 순둥순둥한 아기가 얌전하게 말해서 그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부터 이미 끈질겼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파마를 해 달라고 몇 달을 졸라 결국 뜻을 이뤘고, 자전거는 타고 싶지만 엄마 아빠가 바쁘다는 핑계로 가르쳐 주지 못하는 사이, 며칠 만에 온몸에 멍들고 이빨이 깨져 가며 혼자 배웠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는 욕실에 신선이 나올 정도로 수증기를 가득 채우고 샤워한 후 매번 혼나면서도 그걸 멈추지 않았고, 매일 밤 어린 여동생들보다 자기 등을 쓰다듬으며 재워 달라고 해서 정말 난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결국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고 요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염이 심한 아이는 수증기로 가득 찬 샤워로 코가 치료되었던 것이고, 등을 쓰다듬었던 손길은 상처받아 위축되었던 마음을 풀어줬던 거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후 때로는 아이의 행동과 선택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잘하고 싶어 하는 의도만큼은 믿어 주게 되었다. 사실 100% 그러기는 어렵고 여전히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긴 하다. 아이는 내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성장하고 싶어 했다. |
IT 계열 특성화고를 거쳐 대학까지
그 후에도 아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 나갔다. 음악 수행평가를 위해 밤을 새워 보기도 하고, 유희왕 카드놀이를 거의 전문가처럼 하기도 했으며, 랩을 하겠다고 '쇼미더머니'에 영상을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좋은 성적에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발 책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이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아이의 선한 성장 동력을 믿어 주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는 IT 계열 특성화고등학교 진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성적과 포트폴리오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그 학교에 갈 수 있도록 공부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나와 남편은 아이의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여건이 됨에 감사했다. 아이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내적 동기를 이루어 갔고, 다행히 원했던 학교에 진학해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 부산까지 멀다 않고 관련 전시회를 빠짐없이 다니고 코스프레도 하고 춤도 추러 다녔다. 2학년이 된 어느 날은 베이스 기타를 하고 싶다며 손가락이 터져 가면서도 두 달 만에 놀랄 만한 성장을 이뤄 냈다. 친구들과 함께 밴드 활동도 하면서, 엄마 아빠는 그 나이에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을 이뤄 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게임도 할 시간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배워 나가는 모습을 보니 흡족했지만, 학교 입시 설명회에서 다른 엄마들의 날 선 예민함을 볼 때면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책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모두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모로서 방향을 제시하며 가능한 한 넓은 울타리를 쳐 주려 노력했다. 워낙 기타를 좋아해서 실용음악과 진학을 권유하며 전공자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2학년 2학기 말쯤, 음악은 좋지만 취미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면 취직이 잘되는 공과 대학에 가겠다며 몇 가지 정기 구독 문제집을 추가로 구매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1, 2학년 때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했기에 열심히 해 보라고 등을 두드려 줬다. 공부에 집중한 뒤 아이는 점진적인 성취를 이루며 대학에 진학했고 그 모습이 대견했다. 단, 음악을 계속했더라도, 혹은 또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아이의 성취에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대학에 가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외에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학교 다니며 기타를 치고 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한다. 오히려 작년보다 지루하다고 한다. 이제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 같다. |
배우는 방식이 다른 아이들
얼마 전에 큰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뜻을 세우면 어떻게든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하니, 무엇보다 네가 세우는 계획이 선하길 바란다.” 물론 큰아이의 경우는 일반화할 수 없다. 우리 집도 세 아이마다 성격이 다르고 세상을 배워 나가는 방식이 다르다. 둘째 아이는 올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아침 7시에 등교하고 학원과 스터디 카페를 오가며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낸다. 둘째를 보며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감내하는 우리나라 고등학생과 학부모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는 요즘 무슨 말만 하면 ‘세모눈’을 뜬다. 사춘기가 무르익어 간다는 증거인데, 솔직히 ‘요 녀석도 세모눈 뜰 줄 아네?’ 하면서 속으로 웃는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밥하는 것도 20년째 서툴고 여러모로 부족한 엄마지만, 세 아이 모두에게 시험 점수를 잘 받는 것보다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알아가는 지식을 기쁨으로 배웠으면 한다고 당부하곤 한다. 우리나라의 경쟁 교육 환경 속에서 너무 낭만적인 바람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희망을 바라며 살고 싶다. |
'아직' 그러나 '이미'
큰아이 수능이 불과 2주 남았을 때 썼던 글에서 내 생각을 명확히 해 줄 구절을 발견했다. ‘전에 비해 좀 더 신경 쓰고 먹는 것 하나에도 예민하긴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마법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지도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이가 세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기만의 길을 잘 만들고 있고, 나는 옆에서 지켜본다. 앞서가지 않는다. 그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한 12년의 결과다. 어쩌면 우리가 이루려는 것들이 이상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 그 이상을 바라며 힘을 모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학철 작가의 <지혜문학>(21세기북스, 2024)이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품격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바라는 바를 희망하는 능력에서 온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고 덧없고 부조리하다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역사를 통해 오늘의 사명을 현재에 행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준다. 미래에 실현될 일을 오늘 여기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직 그러나 이미’ 사이에서 모든 부모가 품어야 할 가치가 아닐까 한다. |
*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하고픈 선생님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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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숙제, 우리 집 밥상
나는 평소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어제 먹은 걸 또 먹어도 불평이 없다. 맛집 추천도 어려운데, 메뉴를 직접 정해야 하는 집밥은 더 어렵다. 스무 살 된 첫째는 내가 “맛없다”고 하면 “엄마도 맛없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맛이 없는 거냐”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도 남편과 아이들은 매끼 새로운 메뉴를 원한다. 나름 열심히 짜장밥을 준비했는데, 급식에서 먹었다며 안 먹는 아이나 점심에 짜장면을 먹었다며 외면하는 남편을 보면 정말 얄미워서 파업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작년에는 큰아이가 고등학생, 둘째가 중학생, 막내가 초등학생이어서 귀가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남편 식사까지 합치면 하루에 저녁을 네 번 차릴 때도 있었다. 결혼 생활과 육아 경력 20년이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밥은 내 인생 최대의 과제이자 평생의 고민 같다.
어른들은 뭐든 잘하는 줄 알았지
어릴 적엔 어른들은 뭐든 잘하는 줄 알았다.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을 하며, 뚝딱 밥상을 차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었지만, 저절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이나 후나 난 변함없었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아이들 반응에 늦어 서운하게 하거나, 등교할 때 물통 챙기는 걸 잊기도 했다. 때론 무기력하게 아이들을 방관하기도 했다. 감정이 폭발하면 맹수처럼 변하기도 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막내가 세 살일 때까지 직장에 다녔는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소풍 버스 배웅 한 번을 못 갔다. 큰아이는 그때 서운했던 기억을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했던 후회와 반성을 기록했다면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았을 거다. 당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보지만, 여전히 부족한 엄마라고 느낀다. 남편 또한 장점이 많지만, 내가 생각했던 성숙한 어른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가 되기에는 아직 덜 성장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매일매일 자랐다. 아니, 아이들이 부모를 키웠다.
아이들이 소위 모범생 타입이었다면, 난 내가 잘 키워서 그렇다고 교만했을 거다. 어깨에 힘주고 으스대며 그렇지 못한 부모들을 섣불리 판단했겠지. 똑똑하고, 품행도 단정하고, 행복하기까지 한 아이. 큰아이 유아기 때는 아주 잠깐 그런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보낸 후 온갖 평지풍파를 겪으며 나는 많이 무너지고 깎여 나갔다. 그 과정에서 겸손을 배웠고, 다른 집 아이와 부모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일들을 밖으로 꺼내기엔 아직 용기가 없다. 시간이 지나 풀어낸다면 아마 ‘결혼지옥’이나 ‘금쪽이’ 같은 장르가 될 거다. 지금도 마음 아파하는 아이와 그 부모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리다.
아이들은 부모뿐 아니라 주변 어른, 자연, 환경이 모두 키우고 있었고, 그걸 부모가 일일이 관여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부모의 역할이 크지만, 그 역할조차도 신께 기도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아이를 바구니에 눕혀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심정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훗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들었던 신성욱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더욱 명확해졌고, 아이와 마주 바라보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보다 아이의 마음을 먼저 채우기
자연스럽게 육아와 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2013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후원회원이 되어 올해로 13년째 함께하고 있다. 후원회원이 된 지 3년 뒤에는 지역에 있는 ‘고래이야기 작은도서관’에서도 활동하며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그동안 단체에서 만난 여러 강의, 책, 사람들은 경쟁 교육 속에서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지키고 좀 더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큰아이는 저학년 때 직장 다니는 엄마를 대신할 돌봄이 필요해 태권도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초등 5학년 때까지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그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이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배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집에서 영어책이라도 읽히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가 “엄마가 딴 사람 같아진다”고 해서 포기했었다.
단, 내가 활동하는 ‘고래이야기 작은도서관’의 학년별 독서 동아리는 참여하고 있었다. 이 독서 동아리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들은 백화현 선생님의 강의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곳은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교환의 관계가 아닌 아이들과 아이들을 둘러싼 부모들로 구성되는 공동체의 관계였다. 아이들은 독서 동아리로 모이고 부모 또한 독서 모임을 하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건강한 성장을 함께 이야기했다. 특히 아이들을 주로 이끌어 줬던 도서관 운영위원 친구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따뜻했다. 주변에서는 중학교부터는 수학이 중요하니 영어를 초등학교 때 해 둬야 한다는 잔소리를 은연중에 들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아이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먼저였다. 독서 동아리는 그런 마음 주머니를 채우는 큰 역할을 했다.
아이는 세상을 통해 무엇을 배울까
6학년이 되기 전 방학, 큰아이와 남편이 미얀마에 갔을 때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 시내 쇼핑몰에서 각자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것저것 보다가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는데, 플레이스테이션 매장에서 진열된 PS4를 떨어뜨려 파손시켰다. 주변에 어른은 없고, 말은 통하지 않아 10분 동안 붙잡혀 있었다. 함께 간 또래 형 중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도 있어 그 아이들과 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혼자 떨어져 있으니 대처 능력이 없었던 거다. 어른을 찾아오겠다고 한국어로 말해 봤자 점원은 알아들을 수 없었을 테고. 점원은 “Wait, wait”만 반복하며 아이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일행 중 영어가 유창한 한 명이 나타나 망가진 PS4 대신 고가의 헤드폰을 사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집에 돌아온 며칠 후, 아이는 자기에게 영어 공부가 필요하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먼저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오히려 매일 학원에 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그래도 자기는 공부해서 그 형들처럼 영어를 잘하고 싶단다. 좋은 학원을 찾아 공부를 시작하고, 매일 성실히 노력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들은 편해문 선생님의 강의 중 ‘아이들은 외부에서 제공되는 배움과 내부로부터 오는 성장 에너지로 자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의 내적 동기가 스스로를 움직이게 한 거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아이도 나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아이는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고 성취감을 느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하며 아이의 미래를 막연하게 불안해하지 않고, 공부의 목적을 좋은 성적에 두지 않는 태도가 내 안에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보다는 나와 아이의 관계를 우선하고, 아이가 지금 무엇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있는지에 집중했다.
아이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자신의 성장에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시도해 왔다. 목표를 세우면 그게 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 살 때도 작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해 줘, 해 줘'를 반복했다. 순둥순둥한 아기가 얌전하게 말해서 그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부터 이미 끈질겼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파마를 해 달라고 몇 달을 졸라 결국 뜻을 이뤘고, 자전거는 타고 싶지만 엄마 아빠가 바쁘다는 핑계로 가르쳐 주지 못하는 사이, 며칠 만에 온몸에 멍들고 이빨이 깨져 가며 혼자 배웠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는 욕실에 신선이 나올 정도로 수증기를 가득 채우고 샤워한 후 매번 혼나면서도 그걸 멈추지 않았고, 매일 밤 어린 여동생들보다 자기 등을 쓰다듬으며 재워 달라고 해서 정말 난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결국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고 요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염이 심한 아이는 수증기로 가득 찬 샤워로 코가 치료되었던 것이고, 등을 쓰다듬었던 손길은 상처받아 위축되었던 마음을 풀어줬던 거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후 때로는 아이의 행동과 선택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잘하고 싶어 하는 의도만큼은 믿어 주게 되었다. 사실 100% 그러기는 어렵고 여전히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긴 하다. 아이는 내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성장하고 싶어 했다.
IT 계열 특성화고를 거쳐 대학까지
그 후에도 아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 나갔다. 음악 수행평가를 위해 밤을 새워 보기도 하고, 유희왕 카드놀이를 거의 전문가처럼 하기도 했으며, 랩을 하겠다고 '쇼미더머니'에 영상을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좋은 성적에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발 책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이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아이의 선한 성장 동력을 믿어 주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는 IT 계열 특성화고등학교 진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성적과 포트폴리오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그 학교에 갈 수 있도록 공부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나와 남편은 아이의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여건이 됨에 감사했다. 아이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내적 동기를 이루어 갔고, 다행히 원했던 학교에 진학해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 부산까지 멀다 않고 관련 전시회를 빠짐없이 다니고 코스프레도 하고 춤도 추러 다녔다. 2학년이 된 어느 날은 베이스 기타를 하고 싶다며 손가락이 터져 가면서도 두 달 만에 놀랄 만한 성장을 이뤄 냈다. 친구들과 함께 밴드 활동도 하면서, 엄마 아빠는 그 나이에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을 이뤄 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게임도 할 시간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배워 나가는 모습을 보니 흡족했지만, 학교 입시 설명회에서 다른 엄마들의 날 선 예민함을 볼 때면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책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모두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모로서 방향을 제시하며 가능한 한 넓은 울타리를 쳐 주려 노력했다. 워낙 기타를 좋아해서 실용음악과 진학을 권유하며 전공자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2학년 2학기 말쯤, 음악은 좋지만 취미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면 취직이 잘되는 공과 대학에 가겠다며 몇 가지 정기 구독 문제집을 추가로 구매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1, 2학년 때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했기에 열심히 해 보라고 등을 두드려 줬다. 공부에 집중한 뒤 아이는 점진적인 성취를 이루며 대학에 진학했고 그 모습이 대견했다. 단, 음악을 계속했더라도, 혹은 또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아이의 성취에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대학에 가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외에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학교 다니며 기타를 치고 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한다. 오히려 작년보다 지루하다고 한다. 이제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 같다.
배우는 방식이 다른 아이들
얼마 전에 큰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뜻을 세우면 어떻게든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하니, 무엇보다 네가 세우는 계획이 선하길 바란다.”
물론 큰아이의 경우는 일반화할 수 없다. 우리 집도 세 아이마다 성격이 다르고 세상을 배워 나가는 방식이 다르다. 둘째 아이는 올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아침 7시에 등교하고 학원과 스터디 카페를 오가며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낸다. 둘째를 보며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감내하는 우리나라 고등학생과 학부모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는 요즘 무슨 말만 하면 ‘세모눈’을 뜬다. 사춘기가 무르익어 간다는 증거인데, 솔직히 ‘요 녀석도 세모눈 뜰 줄 아네?’ 하면서 속으로 웃는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밥하는 것도 20년째 서툴고 여러모로 부족한 엄마지만, 세 아이 모두에게 시험 점수를 잘 받는 것보다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알아가는 지식을 기쁨으로 배웠으면 한다고 당부하곤 한다. 우리나라의 경쟁 교육 환경 속에서 너무 낭만적인 바람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희망을 바라며 살고 싶다.
'아직' 그러나 '이미'
큰아이 수능이 불과 2주 남았을 때 썼던 글에서 내 생각을 명확히 해 줄 구절을 발견했다.
‘전에 비해 좀 더 신경 쓰고 먹는 것 하나에도 예민하긴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마법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지도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이가 세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기만의 길을 잘 만들고 있고, 나는 옆에서 지켜본다. 앞서가지 않는다. 그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한 12년의 결과다. 어쩌면 우리가 이루려는 것들이 이상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 그 이상을 바라며 힘을 모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학철 작가의 <지혜문학>(21세기북스, 2024)이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품격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바라는 바를 희망하는 능력에서 온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고 덧없고 부조리하다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역사를 통해 오늘의 사명을 현재에 행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준다. 미래에 실현될 일을 오늘 여기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직 그러나 이미’ 사이에서 모든 부모가 품어야 할 가치가 아닐까 한다.
😊 용은중 선생님을 더 깊이 만나고 싶다면 <인터뷰> 아이를 진짜 믿는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