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없이 살 수 있을까?
사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돼 버린 요즘, 이젠 대학생이 된 아이들과의 지난 15년의 여정은 일종의 실험이고 모험이었다. 일명 ‘사교육 없는 세상 살기(이하 사없세 살기)’ 실험! 사교육의 의미를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어쩌면 앞으로 우리 가족 전 생애에 걸친 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미완성인 이 실험(적 삶의) 중간보고서는 부모 성장 보고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는가. 부모가 변화하고 성장한 만큼 아이들도 달라지고 자라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보고서에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앞서, 내 이야기부터 풀어 보려 한다.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통과의례를 거치며 어른이자 부모로 여기까지 왔는지, 왜 이런 실험을 시작하고 아직까지 멈추지 않고 있는지를 말이다. |
ㅇㅇ에 따라 승패가 갈린 아이들
대학 졸업반 무렵, 수학 과외를 통해 다양한 환경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중 한 아이는 외고를 다니는 부유한 가정의 학생이었다. 타고난 수학 머리가 있어 예상 문제만 몇 번 풀어도 시험을 잘 봤고, 수학 외 주요 과목 모두 과외를 받아 늘 안정적인 상위권을 유지했다. 또 다른 아이는, 아버지가 실직하고 엄마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가정의 학생이었다. 학교 수업만으로 따라가기 어려운 이과 수학 때문에 과외를 받았지만, 다른 과목 성적은 늘 들쭉날쭉해 전체 성적은 고만고만했다.
수학을 좋아했던 이공계 전공자인 내게 다가온 수학 과외 자리는 잘만 하면 ‘큰돈을 벌기 좋은 일’이었지만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부유층 부모들의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성적만 올려 달라”는 주문은 감당하기 어려웠고,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수학 한 과목만으로는 등수를 올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직 부모가 될 계획조차 없던 시절, 나는 ‘유전자(운)와 부모 재력’이 좌우할 수밖에 없는 사교육과 입시 메커니즘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두 아이의 대입 결과는 결말이 이미 정해진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그런 예상된 결과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건, ‘대학’ 하나 때문에 모두가 오랜 시간 불안하고 불행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나조차도, 입시에 가까워질수록 시험 승률에 따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상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자식의 입시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만이 ‘선’으로 여겨지는 그 세상엔, 부모도 없었고 교육도 없었다. 그저 돈으로 입시를 사려는 거래와 시험 기계처럼 빛을 잃어가는 아이들만 있을 뿐이었다.
수학을 좋아했고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거라 생각하며 시작했던 아르바이트였지만, 그 끝은 한없는 무력감과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 고통받는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마무리되었다. 20대 청년 시절, 기이하고 불행하게만 보였던 부모들의 모습은, 10여 년 뒤 진짜 부모가 된 내 안에 선명한 양육 철학을 심어주는 강력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
아이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
대학 지상주의에 빠진 입시 경쟁과 사교육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아이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을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줘야 할까?’로 시작된 고민은, 시간이 흐르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이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닿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은 부모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20대에 보았던 부모들처럼 아이들을 옭아매는 나쁜 부모는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끝없는 자문을 던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다른 부모로 살아가기’라는 실험은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첫 아이를 임신하자마자 내가 준비한 1호 출산 준비물은 기저귀도, 젖병도 아니었다. 대신 내 손에 들린 것은, 자녀 양육의 물질주의와 과잉보호, 조기교육을 경계하라는 책들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내 안에 자리 잡은 육아의 원칙들은 이러했다.
아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믿고 존중할 것. 부모의 욕망으로 그 존재를 훼손하려 들지 말 것. 아이들이 스스로 넘어지고 일어서며 배울 수 있도록, 부모는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필요할 때 도와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무엇을 강요하기보다는, 부모가 먼저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아이들은 그 등을 따라오게 된다는 것. 그리고 부모도 결국은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기에, 아이들이 살아가며 마주칠 고통과 아픔을 모두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더더욱, 믿고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들은 결국, 아이가 자기 인생의 속도와 무게를 견디며 서서히 단단해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
그런데 20대 때부터 준비된 엄마였다고 자부한 내게도, 한국의 조기 사교육 강풍은 피하기 힘들만큼 거셌다. 아니, 강풍을 넘어 재난 같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낯선 나라’에서 3년 여 연구원으로 살다 돌아온 후에 찾아왔다. 유치원생이던 큰아이의 미국 학교 적응은, 영어를 하나도 몰랐음에도 놀랄 만큼 수월했는데, 오히려 언어 문제가 전혀 없는 모국의 학교에 다시 돌아와 적응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다. 귀국을 준비할 때, 지인들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면 ‘그냥 미국에 남으라’며 한국행을 말렸고, 막상 돌아오자마자 국영수 선행과 학원 관리에 대한 조언이 쏟아졌다. “멀쩡한 엄마가 왜 똑똑한 애를 저렇게 바보로 만드냐?”는 소리들로부터 귀를 막고 버티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운명처럼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던 ‘새 세상’을 만났다. 입시 사교육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너무도 무모해 보여서 오히려 내 마음을 단단히 흔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그것이었다. 20대부터 지켜왔던 신념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광풍에 휩쓸려 갈 것처럼 위태롭던 그 순간,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영혼을 구해 줄 ‘안전 기지’를 눈 앞에서 만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난 뒤, 우리는 진짜 확신에 찬 ‘사없세 살기’ 실험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세상과 고립될 것을 각오하고 해야 됐던 실험을, 이젠 대놓고 큰 소리로 세상에 외치면서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거의 질주하듯이 달렸던 거 같다. 등대지기학교 강의는 필수였고 그 외 수많은 강좌를 통해 ‘낡은 세상의 논리가 아닌 새 세상의 비전’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로서 참여한 수많은 활동(2012년 선행교육금지법 제정 운동, 2015년 수포자 운동,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14년 동안의 중랑 등대 모임)에 아이들이 어느새 주체가 되어 있었고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잘못된 교육 환경에 순응하고 무기력해지기 보다,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가고 있었다. |
순탄하던 우리의 ‘사없세 살기 실험’의 가장 큰 위기는 결국 또 입시였다. 초등학생 때 부모와 함께 이미 선행교육금지법 제정을 위한 시민 문화제에 적극 참여할 정도로 ‘사없세 살기’의 자부심에 넘쳤던 첫째 아이, 학교 수업을 나무랄 데 없이 성실히 해 나갔지만 선행 없이 넘기에는 변별력만 내세운 이과 수학 시험의 벽은 너무 높았다. 배움의 과정을 즐기고 꼼꼼히 공부해 나가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입시를 대비한 방대한 분량의 문제 풀이 연습이 따라 줘야 했던 것이다.
복잡하고 냉혹한 입시 앞에서 그저 학교만 믿고 따라온 아이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20대에 이미 경험했던 ‘예정된 결말’을 첫째와 그 친구들의 입시 결과에서도 다시 확인하게 되면서, 우리의 실험(적 삶)의 중단을 선언해야 하는 고비를 맞았었다. ‘이제 달라진 세상을 인정해야 되는 걸까? 우리는 너무 이상에 빠져,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고 세상의 외톨이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의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대학의 등급보다는 전공을 꼼꼼히 살핀 끝에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아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랫동안 이어진 수학 징크스도 완전히 극복해냈다. 고등학교 때는 선행학습과 반복 연습 없이는 풀 수 없었던 킬러문제들 앞에서 좌절하곤 했지만, 대학 미적분학 수업에서는 천천히 이해하고 꼼꼼히 증명 과정을 따라가며 오히려 더 두각을 나타냈다. 초중고 시절부터 몸에 밴 ‘배움의 모든 과정에 진심을 다하는 태도’는, 고교 때의 객관식 단답형 문제 풀이와는 달리 고도의 몰입과 집중을 요구하는 대학 수업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입시의 성패란, 결국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얼마나 성장해 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내 자식의 입시’라는 첫 시험대에서, 오랫동안 부모의 등을 따라 걷다가 이제는 부모보다 더 어른이 된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
둘째의 대입 전형을 앞둔 절박한 어느날 밤
공부 재능이 어느 정도 있었던 첫째와 달리, 둘째는 모든 재능이 미술에만 집중된 아이였다. 지필 시험 중심의 학교 교육 기준으로 보자면, ‘학습 부진아’에 가까웠다. 한글도 모르던 초1 때, 알림장을 그림으로 그려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외국어처럼 느껴졌을 국어 시간을 끝까지 버텨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특하고 고마웠다.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고, 그저 왕따만 당하지 않고 무사히 고등학교 과정만 마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거친 중학교 남자아이들 틈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던 아이, 늘 교실 뒤편에서 친구들을 관찰하며 ‘자기만의 상상’을 만화나 시로 풀어내던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대학을 꿈꾸게 됐던 건 특성화고 디자인과를 진학하고 ‘물 만난 고기’가 되면서였다. 그래도 역시 입시는 또 다른 벽이었다. 더구나 미술 입시는 첫째 때의 경험과는 또 다른 것이어서 결국 전략도, 정보도 다 시행착오로 끝나고 마지막에는 운에 맡기는 형국이 됐었다. 대입 전형을 얼마 안 남겨둔 절박한 어느 날 밤, 둘째와 부둥켜 안고 울며 나눴던 대화 일부를 아래 옮겨 본다. |
나 : 둘째야, 미안해. 엄마가 형 때도 그랬는데 또 너도 입시 앞두고 이렇게 도움이 못 되는구나. 다 이상한 입시가 문제고 엄마가 부족한 거라 여겨 줘. 넌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 생활 잘했잖아. 네가 잘 못 살아서 그런 건 아니야.
둘째 : 엄마, 엄마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떡해요? 엄마는 늘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의 중심이었는데 엄마가 그렇게 흔들리면 어떡해요?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엄마도 늘 그러셨잖아요. 저는 원래 대학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는데요. 미리 준비 못한 제 잘못이지 엄마 잘못 아녜요. |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이들은 그렇게 절로 커 있었으니. 그날 이후 아이와 나는, 대학 이름보다는 ‘아이가 하고 싶은 공부, 시각 디자인의 이론과 실기를 더 갈고닦을 수 있는 과정과 방법에 대한 고민을 같이 했다. 그런 둘째에겐 놀랍게도 입시 행운이 따랐는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겸허함이었다.
대입 발표가 끝난 뒤,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특성화고 대입 성공 수기’ 요청을 받고 쓴 글의 일부를 여기 옮겨 본다. 더 노력하고도 원하는 결과를 못 얻은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성공 수기’라는 말을 마뜩잖아 하면서 쓴 글임을 밝힌다. |
--- 중략 --- 역시 입시는 쉽지 않았다. 고1 말부터 방과 후 수업으로 포트폴리오 전형을 준비했지만, 막상 내려고 보니 작품 수가 너무 부족해서 서류도 못 내봤다. 미술 입시는 실기 시험이 대부분 필수인데, 학원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나로서는 지원할 수 있는 학교가 많지 않았다. 학교 활동과 전공 점수가 강점인 나로서는 학생부종합전형밖에 기댈 수 없었다.
진짜 운에만 맡겨야 하는 특성화고 전형에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특성화고 입학 후 처음부터 대학은 목표가 아니었고 그냥 좋아하는 공부를 재미있고 행복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폭풍 성장을 했던 나 자신을 떠올려 봤다. ‘앞으로 또 어떤 과정을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가며 성장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며 입시 결과에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기대도 안 했던 상향 지원 학교에 최종 합격했다. 정말 행운이 따른 결과다. 그래서 나는 입시 결과를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문화고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갔던 과정이 가장 큰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특성화고 선택이 신의 한 수였던 것처럼 이제 대학에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배우고 도전하며 더 많이 성장해보고 싶다. |
사없세 살기, 가치 있는 모험
위기처럼 느껴졌던 내 아이의 입시라는 가장 높은 벽 앞에서, 나는 오히려 ‘우리 가족의 사없세 살기’는 더없이 가치 있는 모험이고 도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더 많은 부모들에게 작은 증거이자 든든한 선행 데이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모로서의 긴 임무를 다 마치는 날, 이 낯설고도 실험적인 삶이 그저 평범한 모두의 일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사교육 걱정을 전혀 할 필요 없고, 입시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는 세상. 아이들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을 더 빛나고 살아 숨 쉬게 하는 배움의 현장이 펼쳐지는 그런 세상. 그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담으며, 이것으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걸어온 우리 가족의 15년 실험(적 삶)에 대한 중간보고를 마친다. |
*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하고픈 선생님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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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돼 버린 요즘, 이젠 대학생이 된 아이들과의 지난 15년의 여정은 일종의 실험이고 모험이었다. 일명 ‘사교육 없는 세상 살기(이하 사없세 살기)’ 실험! 사교육의 의미를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어쩌면 앞으로 우리 가족 전 생애에 걸친 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미완성인 이 실험(적 삶의) 중간보고서는 부모 성장 보고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는가. 부모가 변화하고 성장한 만큼 아이들도 달라지고 자라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보고서에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앞서, 내 이야기부터 풀어 보려 한다.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통과의례를 거치며 어른이자 부모로 여기까지 왔는지, 왜 이런 실험을 시작하고 아직까지 멈추지 않고 있는지를 말이다.
대학 졸업반 무렵, 수학 과외를 통해 다양한 환경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중 한 아이는 외고를 다니는 부유한 가정의 학생이었다. 타고난 수학 머리가 있어 예상 문제만 몇 번 풀어도 시험을 잘 봤고, 수학 외 주요 과목 모두 과외를 받아 늘 안정적인 상위권을 유지했다. 또 다른 아이는, 아버지가 실직하고 엄마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가정의 학생이었다. 학교 수업만으로 따라가기 어려운 이과 수학 때문에 과외를 받았지만, 다른 과목 성적은 늘 들쭉날쭉해 전체 성적은 고만고만했다.
수학을 좋아했던 이공계 전공자인 내게 다가온 수학 과외 자리는 잘만 하면 ‘큰돈을 벌기 좋은 일’이었지만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부유층 부모들의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성적만 올려 달라”는 주문은 감당하기 어려웠고,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수학 한 과목만으로는 등수를 올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직 부모가 될 계획조차 없던 시절, 나는 ‘유전자(운)와 부모 재력’이 좌우할 수밖에 없는 사교육과 입시 메커니즘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두 아이의 대입 결과는 결말이 이미 정해진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그런 예상된 결과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건, ‘대학’ 하나 때문에 모두가 오랜 시간 불안하고 불행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나조차도, 입시에 가까워질수록 시험 승률에 따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상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자식의 입시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만이 ‘선’으로 여겨지는 그 세상엔, 부모도 없었고 교육도 없었다. 그저 돈으로 입시를 사려는 거래와 시험 기계처럼 빛을 잃어가는 아이들만 있을 뿐이었다.
수학을 좋아했고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거라 생각하며 시작했던 아르바이트였지만, 그 끝은 한없는 무력감과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 고통받는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마무리되었다. 20대 청년 시절, 기이하고 불행하게만 보였던 부모들의 모습은, 10여 년 뒤 진짜 부모가 된 내 안에 선명한 양육 철학을 심어주는 강력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대학 지상주의에 빠진 입시 경쟁과 사교육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아이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을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줘야 할까?’로 시작된 고민은, 시간이 흐르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이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닿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은 부모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20대에 보았던 부모들처럼 아이들을 옭아매는 나쁜 부모는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끝없는 자문을 던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다른 부모로 살아가기’라는 실험은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첫 아이를 임신하자마자 내가 준비한 1호 출산 준비물은 기저귀도, 젖병도 아니었다. 대신 내 손에 들린 것은, 자녀 양육의 물질주의와 과잉보호, 조기교육을 경계하라는 책들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내 안에 자리 잡은 육아의 원칙들은 이러했다.
아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믿고 존중할 것. 부모의 욕망으로 그 존재를 훼손하려 들지 말 것. 아이들이 스스로 넘어지고 일어서며 배울 수 있도록, 부모는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필요할 때 도와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무엇을 강요하기보다는, 부모가 먼저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아이들은 그 등을 따라오게 된다는 것. 그리고 부모도 결국은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기에, 아이들이 살아가며 마주칠 고통과 아픔을 모두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더더욱, 믿고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들은 결국, 아이가 자기 인생의 속도와 무게를 견디며 서서히 단단해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똑똑한 애를 왜 바보로 만드냐?
그런데 20대 때부터 준비된 엄마였다고 자부한 내게도, 한국의 조기 사교육 강풍은 피하기 힘들만큼 거셌다. 아니, 강풍을 넘어 재난 같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낯선 나라’에서 3년 여 연구원으로 살다 돌아온 후에 찾아왔다. 유치원생이던 큰아이의 미국 학교 적응은, 영어를 하나도 몰랐음에도 놀랄 만큼 수월했는데, 오히려 언어 문제가 전혀 없는 모국의 학교에 다시 돌아와 적응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다. 귀국을 준비할 때, 지인들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면 ‘그냥 미국에 남으라’며 한국행을 말렸고, 막상 돌아오자마자 국영수 선행과 학원 관리에 대한 조언이 쏟아졌다. “멀쩡한 엄마가 왜 똑똑한 애를 저렇게 바보로 만드냐?”는 소리들로부터 귀를 막고 버티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운명처럼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던 ‘새 세상’을 만났다. 입시 사교육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너무도 무모해 보여서 오히려 내 마음을 단단히 흔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그것이었다. 20대부터 지켜왔던 신념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광풍에 휩쓸려 갈 것처럼 위태롭던 그 순간,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영혼을 구해 줄 ‘안전 기지’를 눈 앞에서 만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난 뒤, 우리는 진짜 확신에 찬 ‘사없세 살기’ 실험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세상과 고립될 것을 각오하고 해야 됐던 실험을, 이젠 대놓고 큰 소리로 세상에 외치면서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거의 질주하듯이 달렸던 거 같다. 등대지기학교 강의는 필수였고 그 외 수많은 강좌를 통해 ‘낡은 세상의 논리가 아닌 새 세상의 비전’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로서 참여한 수많은 활동(2012년 선행교육금지법 제정 운동, 2015년 수포자 운동,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14년 동안의 중랑 등대 모임)에 아이들이 어느새 주체가 되어 있었고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잘못된 교육 환경에 순응하고 무기력해지기 보다,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가고 있었다.
가장 큰 위기, 첫 아이 입시
순탄하던 우리의 ‘사없세 살기 실험’의 가장 큰 위기는 결국 또 입시였다. 초등학생 때 부모와 함께 이미 선행교육금지법 제정을 위한 시민 문화제에 적극 참여할 정도로 ‘사없세 살기’의 자부심에 넘쳤던 첫째 아이, 학교 수업을 나무랄 데 없이 성실히 해 나갔지만 선행 없이 넘기에는 변별력만 내세운 이과 수학 시험의 벽은 너무 높았다. 배움의 과정을 즐기고 꼼꼼히 공부해 나가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입시를 대비한 방대한 분량의 문제 풀이 연습이 따라 줘야 했던 것이다.
복잡하고 냉혹한 입시 앞에서 그저 학교만 믿고 따라온 아이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20대에 이미 경험했던 ‘예정된 결말’을 첫째와 그 친구들의 입시 결과에서도 다시 확인하게 되면서, 우리의 실험(적 삶)의 중단을 선언해야 하는 고비를 맞았었다. ‘이제 달라진 세상을 인정해야 되는 걸까? 우리는 너무 이상에 빠져,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고 세상의 외톨이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의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대학의 등급보다는 전공을 꼼꼼히 살핀 끝에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아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랫동안 이어진 수학 징크스도 완전히 극복해냈다. 고등학교 때는 선행학습과 반복 연습 없이는 풀 수 없었던 킬러문제들 앞에서 좌절하곤 했지만, 대학 미적분학 수업에서는 천천히 이해하고 꼼꼼히 증명 과정을 따라가며 오히려 더 두각을 나타냈다. 초중고 시절부터 몸에 밴 ‘배움의 모든 과정에 진심을 다하는 태도’는, 고교 때의 객관식 단답형 문제 풀이와는 달리 고도의 몰입과 집중을 요구하는 대학 수업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입시의 성패란, 결국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얼마나 성장해 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내 자식의 입시’라는 첫 시험대에서, 오랫동안 부모의 등을 따라 걷다가 이제는 부모보다 더 어른이 된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둘째의 대입 전형을 앞둔 절박한 어느날 밤
공부 재능이 어느 정도 있었던 첫째와 달리, 둘째는 모든 재능이 미술에만 집중된 아이였다. 지필 시험 중심의 학교 교육 기준으로 보자면, ‘학습 부진아’에 가까웠다. 한글도 모르던 초1 때, 알림장을 그림으로 그려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외국어처럼 느껴졌을 국어 시간을 끝까지 버텨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특하고 고마웠다.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고, 그저 왕따만 당하지 않고 무사히 고등학교 과정만 마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거친 중학교 남자아이들 틈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던 아이, 늘 교실 뒤편에서 친구들을 관찰하며 ‘자기만의 상상’을 만화나 시로 풀어내던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대학을 꿈꾸게 됐던 건 특성화고 디자인과를 진학하고 ‘물 만난 고기’가 되면서였다. 그래도 역시 입시는 또 다른 벽이었다. 더구나 미술 입시는 첫째 때의 경험과는 또 다른 것이어서 결국 전략도, 정보도 다 시행착오로 끝나고 마지막에는 운에 맡기는 형국이 됐었다. 대입 전형을 얼마 안 남겨둔 절박한 어느 날 밤, 둘째와 부둥켜 안고 울며 나눴던 대화 일부를 아래 옮겨 본다.
나 : 둘째야, 미안해. 엄마가 형 때도 그랬는데 또 너도 입시 앞두고 이렇게 도움이 못 되는구나. 다 이상한 입시가 문제고 엄마가 부족한 거라 여겨 줘. 넌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 생활 잘했잖아. 네가 잘 못 살아서 그런 건 아니야.
둘째 : 엄마, 엄마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떡해요? 엄마는 늘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의 중심이었는데 엄마가 그렇게 흔들리면 어떡해요?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엄마도 늘 그러셨잖아요. 저는 원래 대학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는데요. 미리 준비 못한 제 잘못이지 엄마 잘못 아녜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이들은 그렇게 절로 커 있었으니. 그날 이후 아이와 나는, 대학 이름보다는 ‘아이가 하고 싶은 공부, 시각 디자인의 이론과 실기를 더 갈고닦을 수 있는 과정과 방법에 대한 고민을 같이 했다. 그런 둘째에겐 놀랍게도 입시 행운이 따랐는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겸허함이었다.
대입 발표가 끝난 뒤,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특성화고 대입 성공 수기’ 요청을 받고 쓴 글의 일부를 여기 옮겨 본다. 더 노력하고도 원하는 결과를 못 얻은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성공 수기’라는 말을 마뜩잖아 하면서 쓴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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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입시는 쉽지 않았다. 고1 말부터 방과 후 수업으로 포트폴리오 전형을 준비했지만, 막상 내려고 보니 작품 수가 너무 부족해서 서류도 못 내봤다. 미술 입시는 실기 시험이 대부분 필수인데, 학원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나로서는 지원할 수 있는 학교가 많지 않았다. 학교 활동과 전공 점수가 강점인 나로서는 학생부종합전형밖에 기댈 수 없었다.
진짜 운에만 맡겨야 하는 특성화고 전형에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특성화고 입학 후 처음부터 대학은 목표가 아니었고 그냥 좋아하는 공부를 재미있고 행복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폭풍 성장을 했던 나 자신을 떠올려 봤다. ‘앞으로 또 어떤 과정을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가며 성장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며 입시 결과에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기대도 안 했던 상향 지원 학교에 최종 합격했다. 정말 행운이 따른 결과다. 그래서 나는 입시 결과를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문화고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갔던 과정이 가장 큰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특성화고 선택이 신의 한 수였던 것처럼 이제 대학에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배우고 도전하며 더 많이 성장해보고 싶다.
사없세 살기, 가치 있는 모험
위기처럼 느껴졌던 내 아이의 입시라는 가장 높은 벽 앞에서, 나는 오히려 ‘우리 가족의 사없세 살기’는 더없이 가치 있는 모험이고 도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더 많은 부모들에게 작은 증거이자 든든한 선행 데이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모로서의 긴 임무를 다 마치는 날, 이 낯설고도 실험적인 삶이 그저 평범한 모두의 일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사교육 걱정을 전혀 할 필요 없고, 입시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는 세상. 아이들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을 더 빛나고 살아 숨 쉬게 하는 배움의 현장이 펼쳐지는 그런 세상. 그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담으며, 이것으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걸어온 우리 가족의 15년 실험(적 삶)에 대한 중간보고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