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한 7가지 실천 원칙 지역모임을 하며 내가 실천했던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한다. - 자기 할 일은 스스로 하기
자기 방 청소하는 일, 학교 준비물 챙기는 일, 설거지 등 자기 일은 초등 1학년부터 스스로 할 수 있게 했다. 작은 생활 습관부터 독립심의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 자녀 성적에 유연해지기
우리 사회에서 자녀 성적에 초연하기란 쉽지 않지만 지역모임을 통해 객관성을 유지하는 법을 연습하며 도를 닦았다. 성적보다 아이가 배우는 것을 즐기고, 학교생활을 재밌어하면 그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모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교재를 읽고 생각을 나누었다. 처음부터 자녀 성적에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매월 모임이 쌓이고 누적되다 보니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서히 바뀌었고, 습관이 되었다. 나중에는 성적과 상관없이 아이들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해졌고, 아이의 학교생활은 본인의 몫으로, 내 인생은 오롯이 내 것으로 분리할 수 있었다. 나는 단체를 통해 제도적으로 잘못된 교육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아이들과 이런 노력들에 대해 나누기도 했다. 덕분에 아이들도 나름대로의 학교생활을 잘 하면서 어려운 교육 환경에서도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 용돈과 학원비 ‘협상’의 기술
매년 초 아이들과 용돈 협상을 했다. 인상을 원하면 타당한 이유를 쓰게 했다. 부모를 잘 설득해야 용돈 협상에서 유리하니 잔소리를 안 해도 알아서 열심히 쓴다. 학원을 다닌다고 할 때도, 학원에 왜 다니는지 생각을 쓰도록 했다. 일례로, 둘째가 고등학교 때 영어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둘째에게 영어학원을 왜 다녀야 하는지, 학원비는 얼마인지,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집과 학원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둘째는 다 알아보고 나서 학원비에서 약간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던 것 같다. 그때 학원비가 약 40만 원 정도였는데, 너무 비싸다며, 비용과 거리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어 안 다니겠다고 했다. 누가 다니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안 다니겠다고 포기하니 불만도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논술을 배우겠다고 했다. 둘째는 논술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글쓰기는 공부의 기본이며, 대학교에서도 각종 리포트를 쓰는데 유용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회사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며 A4 용지 한 장 가득 이유를 정성스레 써냈다. 그래서 논술학원에 2달 반 정도 보냈다. 물론 성과는 아주 좋았다. 본인의 간절함이 담겼기에 결과 또한 매우 좋았다. - 아이의 흥미에는 최대한 지원을
첫째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카메라를 사 주었다. 그때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 때가 아니었다. 비록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과감히 카메라를 선물했다. 아이는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사진을 찍고 다녔다. 중학교 때는 편집부 부장을 맡아서 카메라를 잘 활용했다. 결국 진로도 영상 관련 분야로 이어졌다. 막내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용산에 컴퓨터 부품을 사러 같이 갔는데, 집에서 밤새도록 조립하고 안 되면 또 용산에 쫓아가곤 했다. 덕분에 막내는 초등학교 때부터 스스로 컴퓨터를 조립해서 사용했다. - 함께 책 읽기
한 달에 일정 금액을 정해 꾸준히 책을 샀다. 지역모임에서 교육에 대한 얘기 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도 병행했기에, 모임에 다녀오면 아이들과 그날의 주제를 같이 나누었다. 책을 읽고 재밌었던 부분이나 아이들이 감명 깊었던 내용을 수다 떨듯 자주 얘기했다. 책을 읽으라고 강요는 안 했지만 부모가 책을 읽는 모범을 보였고 책 읽는 것을 중요시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된 지금도 각자 독서 모임도 하며 책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연예인 관련 이슈나 사회적으로 핫한 주제가 생기면 그 주제를 놓고 자연스럽게 수다를 많이 떨었다. 예를 들면 아이스버킷 챌린지(루게릭병을 도와주기 위해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이 다음 사람을 지목하는 퍼포먼스)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연예인들이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만약 공공 의료보험에서 불치병에 대해 완전 보장을 해 준다면 챌린지가 이토록 유행했을까’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는 고등학교 때 이 주제로 글을 써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창의성이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평소에 여러 가지 주제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면 그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실감했다.
아이들이 다툴 때는 ‘모의재판’을 했다. 가족이 5명이다 보니 한 명은 판사, 두 명은 변호사가 되었다. 의견은 반드시 변호사를 통해서만 전달하게 했는데, 변호사를 통해서 애길 하니까 감정 싸움보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가 앞서게 되었다. 변호사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더 정제된 이야기를 골랐고, 서로가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 학교 공교육 최대한 활용하기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동네에 대해 알아보기란 내용이 있었는데, 쉬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학교에 있는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학교 나무 도감을 만들었다. 근처에 있는 보라매공원을 취재해서 보라매공원 10선이란 책을 만들기도 했는데, 6학년 여름방학 과제였던 이 책을 아이들은 친구들이랑 같이 재미있게 만들었다. 분수대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는 화장실과 산업재해 위령탑을 소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산업재해 위령탑은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노동자들을 기리는 탑으로 내가 꼭 넣으라고 제안했었다. 평소 사람들이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치는 탑이지만, 아이들은 이 탑에 대해 조사한 뒤로 탑을 지나칠 때마다 노동자들의 희생이 생각난다고 했다. 이런 활동들을 자주해서 중고등학교 수행평가에 도움이 많이 됐다. 아이들은 사교육보다는 공교육에서 있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많았다. 아이가 3명이다 보다 보니 거의 50여 분의 교사를 거쳐 간 거 같다(전학까지 합하면). 우리 아이들이 경험했던 교사들은 두 세 분 빼고는 다 좋은 분이었다. 나는 선생님에 대해 아이들에게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 했다. 아이들은 학교 외에 특별한 사교육을 받지 않아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특히 아이들 고3 때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학부모들은 학교 선생님들은 입시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선생님들은 입시 전문가였다. 아이들의 실력을 어느정도 파악하여 그 자료를 가지고 선생님을 찾아뵈면, 선생님들이 관련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셨다. 아이들도 선생님을 믿고 따르니 격려도 해주고, 여러 가지 좋은 정보도 주셨다. 우리 아이들은 입시에서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고등학교 졸업 후 독립하기
부모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돌봐 줄 수는 없다. 독립 시기를 고등학교 후로 생각했다. 그런 부분을 아이들과 같이 자주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독립만큼 중요한 것은, 아이들로부터 부모의 독립이다. 독립은 성인으로서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철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아이들을 독립시킨 후 우리 부부는 귀농했다. 내 또래에 비해 경제적으로 자유로우니 훨씬 삶의 질이 풍요롭다. 아이들 역시 자신의 몫을 해내며 잘 살아가고 있다. |
이미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살다
“어! 사교육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아이 사교육을 시켜볼까 싶어 ‘사교육’이란 키워드를 검색했다. 내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첫발을 들이게된 순간이었다. 마침 그 무렵 단체가 창립했던 터라, ‘사교육’ 키워드를 검색하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주르륵 뜨던 시기였다. 사교육 걱정이 없다니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사교육 없이도 아이가 성적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 의도했던 방향과 다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었지만, 나는 창립 이래 지금까지 단체와 함께 ‘이미 사교육 걱정 없는세상’을 살아왔다. 사교육걱정 활동을 하면서 자녀를 어떤 방향으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을 조금씩 행동에 옮기면서 습관이 되었으며, 결국 우리 아이들은 사교육 걱정 없이 잘 성장했다. 그리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가치대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당당히 독립했다.
삶에 지친 나를 안아주는 모임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IMF 시기였다. 퇴직금도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설상가상으로 세 들어 살던 집도 경매로 넘어가 전세금도 제대로 못 받았다. 거의 빈손으로 보령시에서 서울로 급하게 옮겼다. 동생이 저렴하게 나온 김밥집을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친정에 맡기고 오로지 가게 일에 매달렸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해 바빠 아이 일은 뒷전일 수 밖에 없었다.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주위 아이들이 모두 사교육을 받으니, 나 역시 막연하게나마 학원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업에 치여 다른 학부모와 교류할 틈이 없었다. 결국 인터넷으로 사교육 정보를 찾기 시작했고, 그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내 레이더망에 들어왔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엔 지역모임이 있다. 나에게 이 모임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삶에 지친 몸을 이끌고 모임에 가면 따뜻한 심성의 사람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아이 키우는 고민부터 삶의 고단함까지 자연스럽게 털어 놓으며 서로를 보듬어 주었고,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했다.
지구만큼 무거운 걱정을, 솜털처럼 가볍게
자녀들의 성적 문제로 걱정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지역모임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학부모가 꼭 있었다. 아이들과 겪는 갈등이 너무 커서 무거운 마음으로 모임에 가면, 이미 그런 일을 겪은 선배들이 “아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아이들의 다음 행동과 솔루션까지 예견해 주었다. 그들 덕분에 지구를 걸머진 듯 무거운 문제들이 솜털처럼 가벼워지는 경험을 했다.
아이들 학창 시절 내내 지역모임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내 나름대로 원칙이 만들어졌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소신껏 아이를 기르기란 결코 녹록지 않아 사회적 흐름에 휩쓸려 가기 쉽다. 하지만 건강한 생각을 가진 지역모임원들과 꾸준히 함께 하다보니 개별적으로 교육 방법을 수정하기도 하고, 또 더 나아가 교육 제도를 바꾸기도 했다.
교육은 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 제도를 바꾸는 데 힘을 보태고 학교에 건강하게 문제 제기를 이어갔다. 모두의 문제라고 인식하니, 내 아이의 교육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힘이 길러졌다.
아이를 위한 7가지 실천 원칙
지역모임을 하며 내가 실천했던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한다.
자기 방 청소하는 일, 학교 준비물 챙기는 일, 설거지 등 자기 일은 초등 1학년부터 스스로 할 수 있게 했다. 작은 생활 습관부터 독립심의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녀 성적에 초연하기란 쉽지 않지만 지역모임을 통해 객관성을 유지하는 법을 연습하며 도를 닦았다. 성적보다 아이가 배우는 것을 즐기고, 학교생활을 재밌어하면 그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모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교재를 읽고 생각을 나누었다. 처음부터 자녀 성적에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매월 모임이 쌓이고 누적되다 보니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서히 바뀌었고, 습관이 되었다. 나중에는 성적과 상관없이 아이들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해졌고, 아이의 학교생활은 본인의 몫으로, 내 인생은 오롯이 내 것으로 분리할 수 있었다. 나는 단체를 통해 제도적으로 잘못된 교육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아이들과 이런 노력들에 대해 나누기도 했다. 덕분에 아이들도 나름대로의 학교생활을 잘 하면서 어려운 교육 환경에서도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매년 초 아이들과 용돈 협상을 했다. 인상을 원하면 타당한 이유를 쓰게 했다. 부모를 잘 설득해야 용돈 협상에서 유리하니 잔소리를 안 해도 알아서 열심히 쓴다. 학원을 다닌다고 할 때도, 학원에 왜 다니는지 생각을 쓰도록 했다.
일례로, 둘째가 고등학교 때 영어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둘째에게 영어학원을 왜 다녀야 하는지, 학원비는 얼마인지,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집과 학원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둘째는 다 알아보고 나서 학원비에서 약간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던 것 같다. 그때 학원비가 약 40만 원 정도였는데, 너무 비싸다며, 비용과 거리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어 안 다니겠다고 했다. 누가 다니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안 다니겠다고 포기하니 불만도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논술을 배우겠다고 했다. 둘째는 논술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글쓰기는 공부의 기본이며, 대학교에서도 각종 리포트를 쓰는데 유용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회사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며 A4 용지 한 장 가득 이유를 정성스레 써냈다. 그래서 논술학원에 2달 반 정도 보냈다. 물론 성과는 아주 좋았다. 본인의 간절함이 담겼기에 결과 또한 매우 좋았다.
첫째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카메라를 사 주었다. 그때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 때가 아니었다. 비록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과감히 카메라를 선물했다. 아이는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사진을 찍고 다녔다. 중학교 때는 편집부 부장을 맡아서 카메라를 잘 활용했다. 결국 진로도 영상 관련 분야로 이어졌다.
막내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용산에 컴퓨터 부품을 사러 같이 갔는데, 집에서 밤새도록 조립하고 안 되면 또 용산에 쫓아가곤 했다. 덕분에 막내는 초등학교 때부터 스스로 컴퓨터를 조립해서 사용했다.
한 달에 일정 금액을 정해 꾸준히 책을 샀다. 지역모임에서 교육에 대한 얘기 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도 병행했기에, 모임에 다녀오면 아이들과 그날의 주제를 같이 나누었다. 책을 읽고 재밌었던 부분이나 아이들이 감명 깊었던 내용을 수다 떨듯 자주 얘기했다. 책을 읽으라고 강요는 안 했지만 부모가 책을 읽는 모범을 보였고 책 읽는 것을 중요시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된 지금도 각자 독서 모임도 하며 책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연예인 관련 이슈나 사회적으로 핫한 주제가 생기면 그 주제를 놓고 자연스럽게 수다를 많이 떨었다. 예를 들면 아이스버킷 챌린지(루게릭병을 도와주기 위해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이 다음 사람을 지목하는 퍼포먼스)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연예인들이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만약 공공 의료보험에서 불치병에 대해 완전 보장을 해 준다면 챌린지가 이토록 유행했을까’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는 고등학교 때 이 주제로 글을 써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창의성이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평소에 여러 가지 주제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면 그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실감했다.
아이들이 다툴 때는 ‘모의재판’을 했다. 가족이 5명이다 보니 한 명은 판사, 두 명은 변호사가 되었다. 의견은 반드시 변호사를 통해서만 전달하게 했는데, 변호사를 통해서 애길 하니까 감정 싸움보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가 앞서게 되었다. 변호사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더 정제된 이야기를 골랐고, 서로가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동네에 대해 알아보기란 내용이 있었는데, 쉬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학교에 있는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학교 나무 도감을 만들었다. 근처에 있는 보라매공원을 취재해서 보라매공원 10선이란 책을 만들기도 했는데, 6학년 여름방학 과제였던 이 책을 아이들은 친구들이랑 같이 재미있게 만들었다. 분수대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는 화장실과 산업재해 위령탑을 소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산업재해 위령탑은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노동자들을 기리는 탑으로 내가 꼭 넣으라고 제안했었다. 평소 사람들이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치는 탑이지만, 아이들은 이 탑에 대해 조사한 뒤로 탑을 지나칠 때마다 노동자들의 희생이 생각난다고 했다. 이런 활동들을 자주해서 중고등학교 수행평가에 도움이 많이 됐다.
아이들은 사교육보다는 공교육에서 있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많았다. 아이가 3명이다 보다 보니 거의 50여 분의 교사를 거쳐 간 거 같다(전학까지 합하면). 우리 아이들이 경험했던 교사들은 두 세 분 빼고는 다 좋은 분이었다. 나는 선생님에 대해 아이들에게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 했다. 아이들은 학교 외에 특별한 사교육을 받지 않아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특히 아이들 고3 때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학부모들은 학교 선생님들은 입시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선생님들은 입시 전문가였다. 아이들의 실력을 어느정도 파악하여 그 자료를 가지고 선생님을 찾아뵈면, 선생님들이 관련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셨다. 아이들도 선생님을 믿고 따르니 격려도 해주고, 여러 가지 좋은 정보도 주셨다. 우리 아이들은 입시에서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모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돌봐 줄 수는 없다. 독립 시기를 고등학교 후로 생각했다. 그런 부분을 아이들과 같이 자주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독립만큼 중요한 것은, 아이들로부터 부모의 독립이다. 독립은 성인으로서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철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아이들을 독립시킨 후 우리 부부는 귀농했다. 내 또래에 비해 경제적으로 자유로우니 훨씬 삶의 질이 풍요롭다. 아이들 역시 자신의 몫을 해내며 잘 살아가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독립한다는 것
자녀들한테 꾸준히 심어준 가치는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부당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성인이 되면 독립할 것’이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인간의 노동이 많은 분야에서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책을 외워서 성적을 내는 아이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힘을 가진 아이가 진정으로 잘 성장한 성인이 되리라 믿는다. 이는 미래가 원하는 인재상이기도 하다. 세상은 우리 기성세대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빨리 변한다. 성적이 아닌 아이 자체를 존중해 주고, 한 인간으로서 인격적・경제적 독립을 돕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