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학부모, 불안의 시작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2008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학부모’가 된 나는 눈에 불을 켜며 부모교육을 찾아다녔다. 다시 오지 않을 아이의 성장과정에 전심을 다하리라 마음먹은 시절이었다. 지역사회협의회, 생협, 도서관 등에서 부모교육이 열리면 눈에 띄는 대로 빠짐없이 쫓아다녔다. 그해 여름 한겨레신문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창립 소식을 알게 됐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어쩌다 나의 마음을 끌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은 하루에 수학 문제집을 30분만 풀자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학년이 높아지면 공부 양은 점점 늘어날 텐데 아직 어린 나이부터 학원을 다니는 건 비교육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4학년이 되니 딸의 친구들은 태권도장과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고 영어,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도대체 4학년이 학원까지 가서 공부할 내용이 뭐가 있지? 들여다보면, 최소 1학기 이상의 선행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고작 만 10살도 안 된 아이들을 방과 후에 학원까지 보내서 오래 앉혀 두는 건 비교육적인데다 효율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돌아보면 불안의 시작이었다. |
우물 안 개구리의 하늘 2009년 봄, 사교육걱정에서 열린 8주간의 등대지기학교는 기존의 부모교육과는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지금이야 유튜브만 틀면 교육정보가 쏟아져 나오지만, 17년 전 등대지기학교는 강의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웠다.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일제시대의 잔재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강력한 프레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해방감마저 일었다. 대입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나라가 몇 나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우물 안에서 오매불망 바라보는 좁은 하늘일 뿐이었다. 당시 이우학교 교감선생님이던 이수광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날 밤은 잊히지 않는다. 내 아이를 당장 이우학교에 보내고 싶지만, 이수광 선생님은 지금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자 하셨다. 일개 학부모에 불과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우리 학교를 바꿔보자고 손 내밀 수 있을까. 마지막 강의에서 송인수 대표님의 후원요청에 동참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당장 내가 아이 학교를 바꿀 수는 없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소망이 생겼다. 괴테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망이란 우리 능력에 대한 예감이라고. 나는 우리 교육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있을 거라 믿었다. |
선행 교육의 기세를 꺾다 막 후원회원이 되자마자 사교육걱정이 교육현장에 일으키는 변화는 눈부셨다.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들은 5학년이면 특목고행 열차에 뛰어들어 밤 10시까지 학원에 다니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그런데 사교육걱정의 문제제기와 연속 토론회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각종 경시대회와 듣기평가 등 과잉 상태였던 외고 입시가 영어 내신 성적과 면접만 보는 것으로 단순해졌다. 입시전형이 바뀌자 과열된 특목고 준비 학원의 기세가 꺾이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2014년에 제정된 선행교육규제법은 비록 공교육 내 규제로 그쳤지만, 딸이 중학교에서 치르는 수학시험 난도에서부터 체감되었다. 변별을 목적으로 상위 학년 교육과정에서 꼭 한두 문제씩 출제되던 관행이 사라졌다. 중학교 국어교사인 한 회원은 교육청에서 각 학교의 교육과정 준수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시험문항을 직접 관리 감독한다며 법 제정의 실효성을 체감하게 됐다고 전했다. |
분노를 삭이는 법 이후 10여 년이 흐르고, 이따금씩 선행교육 규제법이 생겨서 사교육 선행학습 시장이 더 커지는 풍선효과가 생겼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연실색한다. 어차피 사교육에서 선행하니, 공교육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논리인가? 교육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선행 사교육을 바로 잡을 대안을 고민하기는커녕 교육운동으로 이룬 결실을 폄훼하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분노는 그뿐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은 일 년 내내 우울과 분노를 오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지역모임 회원들과 안산에서 여의도 국회까지 이어진 생존학생들의 도보순례에 일부 구간이라도 함께했다. 세상을 향한 마음과 달리 집에서는 한참 사춘기를 통과하던 딸이랑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걸까.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공부하길 바라는 걸까.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는 마음은 왜 돌아서면 휘발되는가. 그럴 때면 차라리 집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나았다. 유가족을 위한 치유공간 ‘이웃’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역등대모임 언니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
나의 작은 별, 지역모임
등대지기학교를 졸업하자 각 지역별로 생긴 등대모임은 나의 유일한 양육공동체였다. 내가 속한 서울 송파는 강남지역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다. 강남에서 온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하며 별 기대 없이 떠난 등대지기학교 졸업여행에서 내 아이와 같은 학교 학부모를 만나 이산가족 상봉처럼 반가웠다는 회원도 있었다. 2009년 여름부터 시작된 월1회 모임은 이사와 취업 등으로 흩어지기 전까지 7년간 이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끝없이 생기는 고민에 끙끙거리다 ‘아무래도 이건 지역모임에 가서 물어 봐야겠어.’하고 기다리는 모임이 되었다. 내 아이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들과 한참 얘기 나누다 집에 돌아오면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괴롭던 고민이 별 거 아닌 게 될 때가 많았다. 지향점이 비슷한 부모들끼리 만나서일까, 지역등대모임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겪을 통과의례를 잘 거치도록 함께 걸어가 주었다. 그때 부모 속을 끓이던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성장해 자신만의 삶을 가고 있다. 그 엄마들이 인생친구로 남았음은 물론이다. |
아이 삶의 주도권 자녀를 키우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내 딸이 자기를 잘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요즘 말로 하면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일에 유독 예민한 반응을 하는지 잘 헤아리는 사람으로 자란다면 힘든 상황이나 어려운 관계를 맞닥뜨려도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나가리라. 그러려면 무엇보다 삶의 주도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초등 시절의 딸은 방과 후에 친구 몇몇을 집에 데려와 놀다가 그 친구들이 모두 학원으로 가고 나면 매일 하기로 약속한 영어책 읽기와 수학문제집을 풀었다. 3학년 때는 30분, 6학년이 되어도 두어 시간이면 끝나는 양이었다. 공부를 끝내고 태권도장에 다녀오고 나면 아이는 저녁 내내, 주말이면 주말 내내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놀았다. 돌아보면 사교육도 아이의 요구로 결정한 것만 효과적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한 영어 문법 과외나, 몇 년이나 지속했던 한자 학습지처럼 내가 구슬러서 하게 만든 건 뚜렷하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면 친구들은 영수학원으로 넘어 가던 4학년에 시작한 태권도는 도장에 또래 여자 아이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 내신을 대비하겠노라 시작한 영어학원은 6개월 쯤 다녔을까? 수업 분위기가 나빠져서 이젠 스스로 해도 되겠다면서 그만두었다. 그러다 고1 가을 무렵 진로를 정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
최애 오빠 스티커를 제작해 팔던 딸은 어린 시절 인형놀이를 할 때도 스토리를 만들어 놀이를 전개하기보다 인형에게 가구나 소품을 만들어 주기 좋아하고, 아이돌 덕질을 할 때도 음악을 듣기보다는 최애 오빠 얼굴을 그려 스티커를 제작해서 팔던 딸은 고1이 끝나갈 무렵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에는 미술 선생님의 격려가 결정적이었다. 돌아보면 아이의 학령기 12년 동안 잊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교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은 선생님들이었다. 딸이 ‘나도 선생님이 돼야지’하고 오랫동안 꿈꾸게 만든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들,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꿈을 과감하게 진로로 결정하도록 힘을 실어준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수능이 끝나고 출결이 흐트러지는 걸 걱정하며 끝까지 챙겨주시던 고3 담임 선생님.
덕분에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리는 취업에도 운 좋게 성공했다. 오늘 아침에도 9시부터 임원 보고가 있는데 늦잠을 잤다며 20분만에 준비를 마치고 뛰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새삼 고마웠다. |
무엇이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전업학부모가 되었을 때, 딸이 하루에 30분 문제집 풀기도 하지 않으려 했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공부가 재능보다는 성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딸은 비교적 대한민국 공부 시스템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해야 할 일을 해놓지 않으면 맘 편히 놀지 못하는 불안이 높은 성격 말이다.
게다가 엄마인 나는 자녀가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까지는 아니었다. 공부가 영 아니다 싶으면 다른 진로를 선택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공부는 하는 데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종의 교양이라는 믿음도 컸다. 다만 나는 아이들의 발달과정을 무시하면서 과도한 학습노동에 몰아넣는 문화가 무엇보다 싫었다. 어쩌면 나는 지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네 생각이 틀리지 않아, 그 방향대로 아이를 키워도 돼.’라고 지지하는 사람들. 다행히 나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알게 됐고, 어떤 정책과 대안이 우리의 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 방향인가 고민하는 교사와 활동가, 부모들을 이 안에서 무수히 만났다. |
높은 밤하늘에 떠 있는 이 별이 보이길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의 말처럼 내가 아이를 키우던 시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북극성 같았다. 십 수 년 전보다 정보가 많아진 만큼 교육 환경은 더 복잡해졌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답게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그렇게 많이 달라졌을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나에게 정답이 아닌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혹시 지금 앞이 보이지 않는 부모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높은 밤하늘에 떠 있는 이 별이 꼭 보이길 바란다. |
*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하고픈 선생님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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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학부모, 불안의 시작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2008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학부모’가 된 나는 눈에 불을 켜며 부모교육을 찾아다녔다. 다시 오지 않을 아이의 성장과정에 전심을 다하리라 마음먹은 시절이었다. 지역사회협의회, 생협, 도서관 등에서 부모교육이 열리면 눈에 띄는 대로 빠짐없이 쫓아다녔다. 그해 여름 한겨레신문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창립 소식을 알게 됐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어쩌다 나의 마음을 끌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은 하루에 수학 문제집을 30분만 풀자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학년이 높아지면 공부 양은 점점 늘어날 텐데 아직 어린 나이부터 학원을 다니는 건 비교육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4학년이 되니 딸의 친구들은 태권도장과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고 영어,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도대체 4학년이 학원까지 가서 공부할 내용이 뭐가 있지?
들여다보면, 최소 1학기 이상의 선행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고작 만 10살도 안 된 아이들을 방과 후에 학원까지 보내서 오래 앉혀 두는 건 비교육적인데다 효율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돌아보면 불안의 시작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의 하늘
2009년 봄, 사교육걱정에서 열린 8주간의 등대지기학교는 기존의 부모교육과는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지금이야 유튜브만 틀면 교육정보가 쏟아져 나오지만, 17년 전 등대지기학교는 강의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웠다.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일제시대의 잔재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강력한 프레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해방감마저 일었다. 대입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나라가 몇 나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우물 안에서 오매불망 바라보는 좁은 하늘일 뿐이었다.
당시 이우학교 교감선생님이던 이수광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날 밤은 잊히지 않는다. 내 아이를 당장 이우학교에 보내고 싶지만, 이수광 선생님은 지금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자 하셨다. 일개 학부모에 불과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우리 학교를 바꿔보자고 손 내밀 수 있을까.
마지막 강의에서 송인수 대표님의 후원요청에 동참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당장 내가 아이 학교를 바꿀 수는 없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소망이 생겼다. 괴테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망이란 우리 능력에 대한 예감이라고. 나는 우리 교육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있을 거라 믿었다.
선행 교육의 기세를 꺾다
막 후원회원이 되자마자 사교육걱정이 교육현장에 일으키는 변화는 눈부셨다.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들은 5학년이면 특목고행 열차에 뛰어들어 밤 10시까지 학원에 다니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그런데 사교육걱정의 문제제기와 연속 토론회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각종 경시대회와 듣기평가 등 과잉 상태였던 외고 입시가 영어 내신 성적과 면접만 보는 것으로 단순해졌다. 입시전형이 바뀌자 과열된 특목고 준비 학원의 기세가 꺾이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2014년에 제정된 선행교육규제법은 비록 공교육 내 규제로 그쳤지만, 딸이 중학교에서 치르는 수학시험 난도에서부터 체감되었다. 변별을 목적으로 상위 학년 교육과정에서 꼭 한두 문제씩 출제되던 관행이 사라졌다. 중학교 국어교사인 한 회원은 교육청에서 각 학교의 교육과정 준수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시험문항을 직접 관리 감독한다며 법 제정의 실효성을 체감하게 됐다고 전했다.
분노를 삭이는 법
이후 10여 년이 흐르고, 이따금씩 선행교육 규제법이 생겨서 사교육 선행학습 시장이 더 커지는 풍선효과가 생겼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연실색한다. 어차피 사교육에서 선행하니, 공교육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논리인가? 교육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선행 사교육을 바로 잡을 대안을 고민하기는커녕 교육운동으로 이룬 결실을 폄훼하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분노는 그뿐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은 일 년 내내 우울과 분노를 오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지역모임 회원들과 안산에서 여의도 국회까지 이어진 생존학생들의 도보순례에 일부 구간이라도 함께했다.
세상을 향한 마음과 달리 집에서는 한참 사춘기를 통과하던 딸이랑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걸까.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공부하길 바라는 걸까.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는 마음은 왜 돌아서면 휘발되는가. 그럴 때면 차라리 집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나았다. 유가족을 위한 치유공간 ‘이웃’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역등대모임 언니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나의 작은 별, 지역모임
등대지기학교를 졸업하자 각 지역별로 생긴 등대모임은 나의 유일한 양육공동체였다. 내가 속한 서울 송파는 강남지역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다. 강남에서 온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하며 별 기대 없이 떠난 등대지기학교 졸업여행에서 내 아이와 같은 학교 학부모를 만나 이산가족 상봉처럼 반가웠다는 회원도 있었다. 2009년 여름부터 시작된 월1회 모임은 이사와 취업 등으로 흩어지기 전까지 7년간 이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끝없이 생기는 고민에 끙끙거리다 ‘아무래도 이건 지역모임에 가서 물어 봐야겠어.’하고 기다리는 모임이 되었다. 내 아이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들과 한참 얘기 나누다 집에 돌아오면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괴롭던 고민이 별 거 아닌 게 될 때가 많았다. 지향점이 비슷한 부모들끼리 만나서일까, 지역등대모임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겪을 통과의례를 잘 거치도록 함께 걸어가 주었다. 그때 부모 속을 끓이던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성장해 자신만의 삶을 가고 있다. 그 엄마들이 인생친구로 남았음은 물론이다.
아이 삶의 주도권
자녀를 키우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내 딸이 자기를 잘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요즘 말로 하면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일에 유독 예민한 반응을 하는지 잘 헤아리는 사람으로 자란다면 힘든 상황이나 어려운 관계를 맞닥뜨려도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나가리라. 그러려면 무엇보다 삶의 주도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초등 시절의 딸은 방과 후에 친구 몇몇을 집에 데려와 놀다가 그 친구들이 모두 학원으로 가고 나면 매일 하기로 약속한 영어책 읽기와 수학문제집을 풀었다. 3학년 때는 30분, 6학년이 되어도 두어 시간이면 끝나는 양이었다. 공부를 끝내고 태권도장에 다녀오고 나면 아이는 저녁 내내, 주말이면 주말 내내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놀았다.
돌아보면 사교육도 아이의 요구로 결정한 것만 효과적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한 영어 문법 과외나, 몇 년이나 지속했던 한자 학습지처럼 내가 구슬러서 하게 만든 건 뚜렷하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면 친구들은 영수학원으로 넘어 가던 4학년에 시작한 태권도는 도장에 또래 여자 아이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 내신을 대비하겠노라 시작한 영어학원은 6개월 쯤 다녔을까? 수업 분위기가 나빠져서 이젠 스스로 해도 되겠다면서 그만두었다. 그러다 고1 가을 무렵 진로를 정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최애 오빠 스티커를 제작해 팔던 딸은
어린 시절 인형놀이를 할 때도 스토리를 만들어 놀이를 전개하기보다 인형에게 가구나 소품을 만들어 주기 좋아하고, 아이돌 덕질을 할 때도 음악을 듣기보다는 최애 오빠 얼굴을 그려 스티커를 제작해서 팔던 딸은 고1이 끝나갈 무렵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에는 미술 선생님의 격려가 결정적이었다. 돌아보면 아이의 학령기 12년 동안 잊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교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은 선생님들이었다. 딸이 ‘나도 선생님이 돼야지’하고 오랫동안 꿈꾸게 만든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들,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꿈을 과감하게 진로로 결정하도록 힘을 실어준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수능이 끝나고 출결이 흐트러지는 걸 걱정하며 끝까지 챙겨주시던 고3 담임 선생님.
덕분에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리는 취업에도 운 좋게 성공했다. 오늘 아침에도 9시부터 임원 보고가 있는데 늦잠을 잤다며 20분만에 준비를 마치고 뛰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새삼 고마웠다.
무엇이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전업학부모가 되었을 때, 딸이 하루에 30분 문제집 풀기도 하지 않으려 했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공부가 재능보다는 성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딸은 비교적 대한민국 공부 시스템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해야 할 일을 해놓지 않으면 맘 편히 놀지 못하는 불안이 높은 성격 말이다.
게다가 엄마인 나는 자녀가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까지는 아니었다. 공부가 영 아니다 싶으면 다른 진로를 선택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공부는 하는 데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종의 교양이라는 믿음도 컸다.
다만 나는 아이들의 발달과정을 무시하면서 과도한 학습노동에 몰아넣는 문화가 무엇보다 싫었다. 어쩌면 나는 지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네 생각이 틀리지 않아, 그 방향대로 아이를 키워도 돼.’라고 지지하는 사람들. 다행히 나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알게 됐고, 어떤 정책과 대안이 우리의 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 방향인가 고민하는 교사와 활동가, 부모들을 이 안에서 무수히 만났다.
높은 밤하늘에 떠 있는 이 별이 보이길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의 말처럼 내가 아이를 키우던 시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북극성 같았다. 십 수 년 전보다 정보가 많아진 만큼 교육 환경은 더 복잡해졌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답게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그렇게 많이 달라졌을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나에게 정답이 아닌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혹시 지금 앞이 보이지 않는 부모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높은 밤하늘에 떠 있는 이 별이 꼭 보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