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1이지만 덩치가 큰 장훈(가명)이는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포스가 남달랐다. 책만 책상에 올려놓고 주로 밖에 나가 한참 있다가 들어와서는 문제집에 아무 답이나 고르고
“몰라요!!”
라고 말하는 아이였다.
“다음 시간에는 공부 조금 해보자~”
“싫어요!!” 라고 말하며 나가는 장훈이의 뒤통수에 대고 내가 말했다.
“소신 있네~”
자신의 생각이 없이 시들해서 “예~” 하는 것보다 나는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장훈이가 오히려 내적인 힘이 있는 아이 같아 보여서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소신 있네”
짧은 말 한마디의 기적은 다음 수업에서 나타났다. 몇 달을 학원 안보다 밖에서 서성인 시간이 더 많았다는 장훈이가 교실에 앉아있기 시작했다. 장훈이가 어떤 운동을 좋아하고 주말에는 어떤 일정이 있는지 내가 알게 될 무렵, 학원 친구들 과도 꽤 친근해진 장훈이는 영어 단어 쓰기 연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예 학습을 거부하던 장훈이가 이제 내가 단어 테스트를 하자 하며,
“명사, 동사, 형용사 중에 뭘 물어볼까?” 하면 사뭇 진지하게
“동사요! 동사는 다 외웠어요!” 라고 말할 때, 나는 이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아주 귀여운 중1 아기라는 사실이 사랑스럽다.
똑똑한 정민(가명)이는 ADHD 증상과 틱을 보이는 중1 남학생이다. 이 아이도 다른 반에 있다가 나에게 온 특별한 손님이다.
다분히 산만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걸 계속 말로 풀어야 해서, 친구들이 ‘징징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집에 가고 싶어요”
“아 모르겠어요” “이 단어 무슨 뜻 이에요”
“아 영어 싫어”
“oo이는 왜 아직 안 와요?”
정말 업무 피로도가 극상으로 올라간다는 게 느껴졌다.
하루는 정민이가 종이컵으로 장난을 치는데 기발했다. 이때다 싶어 나는 말을 건넸다.
“정민아. 너는 참 창의적이네.”
“제가요?”
“응. 그런데 창의적인 사람들 특징이 뭔 지 아니?”
“몰라요.”
“창의적인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주변에 관심이 많아. 너처럼. 그건 좋은 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집중하는 건 좀 어렵겠지? 그래서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해.”
그 이후 정민이가 상황파악 구분없이 산만해질 때마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다?”
“집중력!” 이라고 정민이와 교실 아이들이 다같이 외치게 되었고
매번 딴 짓 하느라 할 분량을 다하지 못해 늦게 가던 정민이의 학습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좋은 건, 다른 아이들이 정민이를 시끄러운 천덕꾸러기로 보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내가 비폭력 대화를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비폭력 대화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교묘한 말 기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 자신을 마치 빈 배가 된 듯이 비우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면, 학업 거부 장훈이가 자신의 감정을 용기 있게 말하는 소신이 있는 아이라는 것이 보이고, 산만 그 잡채인 정민이가 호기심 많고 창의적인 아이라는 게 보인다. 이 아이들은 아마도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있겠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지에 대한 불안과 인정 욕구가 있다. 자신이 어떤 아이인지 내가 묘사할 때마다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가지는 것 같다. 어른들이 정한 기준에 밀어 올리려 아이를 도구로 볼 때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느끼고 진절머리를 내는 것이다.
요즘, 교사(대학의 교수)도 학부모들 민원에 힘들고 자영업자도 손님들 민원에 힘들고, 의사도 엄마들 민원에 힘들다고 한다. 어쩌다 사람이 사람을 불신하고 진저리 나게 만드는 사회가 되었을까? 나는 우리 모두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이 정도는 나와야 하고, 집은 이 정도 동네나 평수는 맞춰야 하고, 직장은, 돈은… 끝도 없는 줄세우기가 결국 서로 서로에게 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신념을 만들어 온 것 아닐까?
내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어 지길 원하듯이, 아이들도 제발 있는 그대로 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아이가 가진 미덕이 얼마나 아름답게 잘 드러나는지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3반수를 한답시고 낮밤이 뒤바뀌고 몸 상해가며 좀비처럼 있다가 밤나들이를 나간 나의 아들을 생각한다. 남의 집 아들들한테는 그렇게 비폭력 대화가 잘 되는데 우리집 아들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남의 집 아줌마가 우리 아들의 미덕도 찾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 아이들을 같이 성숙하게 키웠으면 좋겠다.
중 1이지만 덩치가 큰 장훈(가명)이는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포스가 남달랐다. 책만 책상에 올려놓고 주로 밖에 나가 한참 있다가 들어와서는 문제집에 아무 답이나 고르고
“몰라요!!”
라고 말하는 아이였다.
“다음 시간에는 공부 조금 해보자~”
“싫어요!!” 라고 말하며 나가는 장훈이의 뒤통수에 대고 내가 말했다.
“소신 있네~”
자신의 생각이 없이 시들해서 “예~” 하는 것보다 나는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장훈이가 오히려 내적인 힘이 있는 아이 같아 보여서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소신 있네”
짧은 말 한마디의 기적은 다음 수업에서 나타났다. 몇 달을 학원 안보다 밖에서 서성인 시간이 더 많았다는 장훈이가 교실에 앉아있기 시작했다. 장훈이가 어떤 운동을 좋아하고 주말에는 어떤 일정이 있는지 내가 알게 될 무렵, 학원 친구들 과도 꽤 친근해진 장훈이는 영어 단어 쓰기 연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예 학습을 거부하던 장훈이가 이제 내가 단어 테스트를 하자 하며,
“명사, 동사, 형용사 중에 뭘 물어볼까?” 하면 사뭇 진지하게
“동사요! 동사는 다 외웠어요!” 라고 말할 때, 나는 이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아주 귀여운 중1 아기라는 사실이 사랑스럽다.
똑똑한 정민(가명)이는 ADHD 증상과 틱을 보이는 중1 남학생이다. 이 아이도 다른 반에 있다가 나에게 온 특별한 손님이다.
다분히 산만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걸 계속 말로 풀어야 해서, 친구들이 ‘징징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집에 가고 싶어요”
“아 모르겠어요” “이 단어 무슨 뜻 이에요”
“아 영어 싫어”
“oo이는 왜 아직 안 와요?”
정말 업무 피로도가 극상으로 올라간다는 게 느껴졌다.
하루는 정민이가 종이컵으로 장난을 치는데 기발했다. 이때다 싶어 나는 말을 건넸다.
“정민아. 너는 참 창의적이네.”
“제가요?”
“응. 그런데 창의적인 사람들 특징이 뭔 지 아니?”
“몰라요.”
“창의적인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주변에 관심이 많아. 너처럼. 그건 좋은 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집중하는 건 좀 어렵겠지? 그래서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해.”
그 이후 정민이가 상황파악 구분없이 산만해질 때마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다?”
“집중력!” 이라고 정민이와 교실 아이들이 다같이 외치게 되었고
매번 딴 짓 하느라 할 분량을 다하지 못해 늦게 가던 정민이의 학습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좋은 건, 다른 아이들이 정민이를 시끄러운 천덕꾸러기로 보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내가 비폭력 대화를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비폭력 대화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교묘한 말 기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 자신을 마치 빈 배가 된 듯이 비우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면, 학업 거부 장훈이가 자신의 감정을 용기 있게 말하는 소신이 있는 아이라는 것이 보이고, 산만 그 잡채인 정민이가 호기심 많고 창의적인 아이라는 게 보인다. 이 아이들은 아마도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있겠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지에 대한 불안과 인정 욕구가 있다. 자신이 어떤 아이인지 내가 묘사할 때마다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가지는 것 같다. 어른들이 정한 기준에 밀어 올리려 아이를 도구로 볼 때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느끼고 진절머리를 내는 것이다.
요즘, 교사(대학의 교수)도 학부모들 민원에 힘들고 자영업자도 손님들 민원에 힘들고, 의사도 엄마들 민원에 힘들다고 한다. 어쩌다 사람이 사람을 불신하고 진저리 나게 만드는 사회가 되었을까? 나는 우리 모두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이 정도는 나와야 하고, 집은 이 정도 동네나 평수는 맞춰야 하고, 직장은, 돈은… 끝도 없는 줄세우기가 결국 서로 서로에게 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신념을 만들어 온 것 아닐까?
내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어 지길 원하듯이, 아이들도 제발 있는 그대로 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아이가 가진 미덕이 얼마나 아름답게 잘 드러나는지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3반수를 한답시고 낮밤이 뒤바뀌고 몸 상해가며 좀비처럼 있다가 밤나들이를 나간 나의 아들을 생각한다. 남의 집 아들들한테는 그렇게 비폭력 대화가 잘 되는데 우리집 아들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남의 집 아줌마가 우리 아들의 미덕도 찾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 아이들을 같이 성숙하게 키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