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등대나눔자료]
p1. 여는 시 : 선물 (나태주)
p2. 민주시민교육 포럼 : 윤석열의 실패를 통해 우리 교육을 성찰하다(이혁규)
p5. 교육정책 : 21대 대선, 입시경쟁 고통 해소할 공약 실종
(참고) '서울대 10개 만들기' 좀더 알고 싶다면
p.6 걱정을 정리하는 중 : 자녀와 정치 이야기 하시나요?
p.8 다양한 이야기 : 수면제 대신에 사람 (양창모)
6월 나눔자료에는 3쪽에 달하는 이혁규 선생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분량을 실은 것은 그만큼 다 같이 읽기에 좋은 글이라는 강력 추천이란 의미입니다. 😉 [걱정을 정리하는 중]도 고심고심 정리했으니, 등대장께서 미리 한 번 훑어보시고 잘 활용해주세요!
윤석열의 실패를 통해 우리 교육을 성찰한다
이혁규(청주교대 교수)
우리는 모두 홀로 태어난다. 실존주의자들의 언어를 빌면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다. 요람에 던져진 무기력한 유아들이 첫 번째로 수혈 받아야 할 교육의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로서의 자신이 한없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정서와 인식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인간 교육의 첫 단추이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인간 존중 정신을 내재화하는 첫 출발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이 첫 걸음부터 비틀거린다. 걸음마를 내딛자마자 우리 사회는 살인적인 경쟁 속으로 등을 떠민다. ‘오징어 게임’으로 상징되는 전쟁터로 말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비교의 압력을 받으며 과도한 우월감과 심각한 열등감과 같은 뒤틀린 자아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개인으로서의 윤석열은 우리 교육의 이러한 첫 단계에서의 실패를 잘 드러낸다.
윤석열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행동거지 곳곳에는 낮은 자존감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다. 그는 사과에 인색하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타자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를 폭력으로 응수한다. 이 모든 특성이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의 전형성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낮은 자존감을 보이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시카 조엘 알렉산더가 쓴 『행복을 배우는 덴마크 학교 이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참고로 알렉산더는 덴마크인과 국제 결혼을 한 미국 여성이다. 그녀는 덴마크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인 예스퍼 율(Jesper Juul)의 개념 구분을 바탕으로 “덴마크 교육은 자존감을 기르는 교육인데 미국 교육은 자신감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존감(self-esteem)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나는 존재 자체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내면의 자기 가치에 기반한다. 이에 비해 자신감(self-confidence)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에 유능하며,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개념으로, 학위, 상장, 자격증 등 외부적 성취와 관련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덴마크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데 반해, 미국 교육은 성취와 능력을 강조하여 자신감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교육의 최초 발화점의 철학적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엄청나게 다른 사회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덴마크와 미국 사회의 차이를 길게 부연하지는 않겠다. 민주주의 200년 역사를 지닌 미국 사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 그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미국보다 더 성취와 업적 지향적이다. 유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외부적 성취를 향해 몰아가는 비정상적인 사회이다. 거기서 살아남고 성공한 윤석열은 매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매우 허약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이다. 높은 자신감과 낮은 자존감의 조합은 우리 사회의 성공한 많은 사람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에 대한 적대와 공격으로 때로 표출된다. 이 점에서 윤석열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탄핵을 외치는 열기로 광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순간에도 초등학생 의대 진학반이 대치동에서 시작되어 확산되고 있는 야만적 현실이 공존한다. 존재로서의 자기 존중을 가르쳐야 할 소중한 시기에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야만적 교육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심한 괴리로 자신도 괴롭고 타자도 괴롭히는 또 다른 윤석열을 이 시간에도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감 능력과 공화주의적 사고의 부재
존재로서의 자존감을 배우는 다음 단계에 맞이하는 교육적 과업은 사회인으로서 타자와 관계 맺기이다. 여기서 흔히 강조되는 것은 타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으로서 공감 능력이다. 윤석열은 이러한 공감 능력의 결핍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공감의 역설’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더 잘 해석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오랫동안 부족 단위의 소수 공동체에서 살면서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을 구분해 왔다. 자연스럽게 내집단 구성원에게는 강한 공감과 연대 의식을, 외집단 구성원
에 대해서는 차별과 배제 및 적대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내집단에 대해서는 공감의 과잉이 발생할 수 있고 외집단에 대해서는 공감의 심각한 결핍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를 공감의 역설이라고 한다. 윤석열은 자신과 가까운 집단에는 극단적으로 공감하는 반면, 반대 집단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의 공감 범위는 아내와 몇몇 측근에 한정되어 있다. 한마디로 석기 시대 부족민인 셈이다. 그의 아내에 대한 끝도 없는 헌신과 추종은 이런 부족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공감 편향은 결국 내집단을 지키기 위한 비상계엄과 같은 극단적 조치로 나타났다.
이처럼 협량(狹量)한 공감 능력은 위험하다. 공감이 내집단을 넘어서 타자와 사회 전체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정서적 공감뿐만 아니라, 인지적 공감(cognitive empathy)과 공화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정적 연결고리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지적 공감을 통해 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공감의 확장을 위해서는 공화주의적 사고가 요구된다. 공화주의적 사고는 ‘나와 너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다’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을 초월하게 한다.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공감의 범위는 좁은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 연대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경쟁과 파편화를 부추기고 협력적 공감과 연대 의식을 길러주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수많은 내집단들의 파편화된 섬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는 갈등 공화국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현실은 우리 교육의 근본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내재화하는 시민교육의 실패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서 윤석열의 실패를 생각해 보자. 비상계엄 사건은 민주적 가치와 절차적 다원성을 이해하지 못한 대통령의 리더십 실패를 극명히 보여준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다양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완전히 반대로 갔다. 그는 사회적 갈등을 극단화하고 폭력으로 반대자를 제압하는 비상식적 통치 행위를 보였다. 그
런데 문제는 대통령만이 아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을 드러낸다. 우리 편이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우리 사회의 적잖은 시민들이 지니고 있다. 이것이 윤석열을 대통령까지 밀어 올린 집단 의지이다. 따라서 현 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을 내쫓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공의 장에서 살아가는 시민이자 주권자들에게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가치와 절차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등이 소개되고 강조되어 왔다. 논쟁적 사안은 논쟁적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학생들은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겉으로는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논쟁적인 이슈를 신념과 확신에 기반해서 주장하고 실천하는 사례를 적잖이 목격했다. 이런 의식과 행동의 이중성은 쉽게 간파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심층 모순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종종 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포획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와 유사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만 SNS에서 소통하니 이런 현상이 더 강화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원적 가치와 신념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야 한다. 논쟁적 문제를 논쟁적 문제로 제대로 다루고, 민주적 대화와 절차적 해결을 정착시키고, 다원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협력과 연대와 공존의 길이 열릴 것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실패는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우리 모두의 실패를 말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시민교육의 일상화를 요구한다.
생애 교육의 새로운 방향: 자존감, 공감, 민주주의 교육
지금까지 윤석열 대통령을 사례로 하여 우리 교육의 심각한 결함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요람에서 시작하여 사회인으로 그리고 공적 주체로 성장하는 여정과 관련된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교육의 방향은 인간 실존의 기초로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자존감 교육(1단계), 사회적 존재로서 내집단-외집단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감 교육(2단계), 시민이자 주권자라는 공적 존재로서 절차적 다원성을 존중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사회를 향한 실천적 능력을 배양하는 협의의 민주주의 교육(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넓게 보면 민주시민교육은 이 모든 단계를 포괄한다.
첫째, 삶의 첫 단계에서 필요한 자존감 교육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내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만이 타자를 환대하고 존중할 수 있다.
둘째, 사회적 존재로 입문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공감 교육이다. 사회적 존재로 입문하고 성장하면서 내집단-외집단 경계를 초월하여 공감과 연대를 확장하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서적ㆍ인지적 공감 교육과 함께 공화주의적 가치를 배워야 한다.
셋째, 상상의 공동체의 공적 존재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민주시민 교육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듯이, 민족, 국가, 지구촌 등은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이다. 이와 같이 더 넓은 상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적 가치를 내재화하고 다원화된 사회의 갈등 해결 능력을 기르고 사회적 책임을 바탕으로 사회 변혁의 주체로 참여하는 실천적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각 단계의 교육은 상호 연계되고 강화되며, 총체적인 인간 교육과 시민 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제 경쟁과 파편화된 교육을 넘어, 모든 존재가 존중받고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직도 내란 세력이 남겨 놓은 적대와 혐오가 청산되지 않은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이러한 생애 전반의 교육을 다시 성찰하고 새로운 실천을 힘차게 열어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다.
[6월 등대나눔자료]
p1. 여는 시 : 선물 (나태주)
p2. 민주시민교육 포럼 : 윤석열의 실패를 통해 우리 교육을 성찰하다(이혁규)
p5. 교육정책 : 21대 대선, 입시경쟁 고통 해소할 공약 실종
(참고) '서울대 10개 만들기' 좀더 알고 싶다면
p.6 걱정을 정리하는 중 : 자녀와 정치 이야기 하시나요?
p.8 다양한 이야기 : 수면제 대신에 사람 (양창모)
6월 나눔자료에는 3쪽에 달하는 이혁규 선생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분량을 실은 것은 그만큼 다 같이 읽기에 좋은 글이라는 강력 추천이란 의미입니다. 😉 [걱정을 정리하는 중]도 고심고심 정리했으니, 등대장께서 미리 한 번 훑어보시고 잘 활용해주세요!
윤석열의 실패를 통해 우리 교육을 성찰한다
이혁규(청주교대 교수)
우리는 모두 홀로 태어난다. 실존주의자들의 언어를 빌면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다. 요람에 던져진 무기력한 유아들이 첫 번째로 수혈 받아야 할 교육의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로서의 자신이 한없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정서와 인식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인간 교육의 첫 단추이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인간 존중 정신을 내재화하는 첫 출발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이 첫 걸음부터 비틀거린다. 걸음마를 내딛자마자 우리 사회는 살인적인 경쟁 속으로 등을 떠민다. ‘오징어 게임’으로 상징되는 전쟁터로 말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비교의 압력을 받으며 과도한 우월감과 심각한 열등감과 같은 뒤틀린 자아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개인으로서의 윤석열은 우리 교육의 이러한 첫 단계에서의 실패를 잘 드러낸다.
윤석열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행동거지 곳곳에는 낮은 자존감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다. 그는 사과에 인색하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타자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를 폭력으로 응수한다. 이 모든 특성이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의 전형성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낮은 자존감을 보이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시카 조엘 알렉산더가 쓴 『행복을 배우는 덴마크 학교 이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참고로 알렉산더는 덴마크인과 국제 결혼을 한 미국 여성이다. 그녀는 덴마크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인 예스퍼 율(Jesper Juul)의 개념 구분을 바탕으로 “덴마크 교육은 자존감을 기르는 교육인데 미국 교육은 자신감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존감(self-esteem)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나는 존재 자체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내면의 자기 가치에 기반한다. 이에 비해 자신감(self-confidence)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에 유능하며,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개념으로, 학위, 상장, 자격증 등 외부적 성취와 관련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덴마크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데 반해, 미국 교육은 성취와 능력을 강조하여 자신감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교육의 최초 발화점의 철학적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엄청나게 다른 사회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덴마크와 미국 사회의 차이를 길게 부연하지는 않겠다. 민주주의 200년 역사를 지닌 미국 사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 그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미국보다 더 성취와 업적 지향적이다. 유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외부적 성취를 향해 몰아가는 비정상적인 사회이다. 거기서 살아남고 성공한 윤석열은 매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매우 허약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이다. 높은 자신감과 낮은 자존감의 조합은 우리 사회의 성공한 많은 사람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에 대한 적대와 공격으로 때로 표출된다. 이 점에서 윤석열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탄핵을 외치는 열기로 광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순간에도 초등학생 의대 진학반이 대치동에서 시작되어 확산되고 있는 야만적 현실이 공존한다. 존재로서의 자기 존중을 가르쳐야 할 소중한 시기에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야만적 교육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심한 괴리로 자신도 괴롭고 타자도 괴롭히는 또 다른 윤석열을 이 시간에도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감 능력과 공화주의적 사고의 부재
존재로서의 자존감을 배우는 다음 단계에 맞이하는 교육적 과업은 사회인으로서 타자와 관계 맺기이다. 여기서 흔히 강조되는 것은 타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으로서 공감 능력이다. 윤석열은 이러한 공감 능력의 결핍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공감의 역설’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더 잘 해석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오랫동안 부족 단위의 소수 공동체에서 살면서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을 구분해 왔다. 자연스럽게 내집단 구성원에게는 강한 공감과 연대 의식을, 외집단 구성원
에 대해서는 차별과 배제 및 적대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내집단에 대해서는 공감의 과잉이 발생할 수 있고 외집단에 대해서는 공감의 심각한 결핍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를 공감의 역설이라고 한다. 윤석열은 자신과 가까운 집단에는 극단적으로 공감하는 반면, 반대 집단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의 공감 범위는 아내와 몇몇 측근에 한정되어 있다. 한마디로 석기 시대 부족민인 셈이다. 그의 아내에 대한 끝도 없는 헌신과 추종은 이런 부족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공감 편향은 결국 내집단을 지키기 위한 비상계엄과 같은 극단적 조치로 나타났다.
이처럼 협량(狹量)한 공감 능력은 위험하다. 공감이 내집단을 넘어서 타자와 사회 전체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정서적 공감뿐만 아니라, 인지적 공감(cognitive empathy)과 공화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정적 연결고리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지적 공감을 통해 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공감의 확장을 위해서는 공화주의적 사고가 요구된다. 공화주의적 사고는 ‘나와 너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다’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을 초월하게 한다.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공감의 범위는 좁은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 연대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경쟁과 파편화를 부추기고 협력적 공감과 연대 의식을 길러주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수많은 내집단들의 파편화된 섬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는 갈등 공화국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현실은 우리 교육의 근본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내재화하는 시민교육의 실패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서 윤석열의 실패를 생각해 보자. 비상계엄 사건은 민주적 가치와 절차적 다원성을 이해하지 못한 대통령의 리더십 실패를 극명히 보여준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다양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완전히 반대로 갔다. 그는 사회적 갈등을 극단화하고 폭력으로 반대자를 제압하는 비상식적 통치 행위를 보였다. 그
런데 문제는 대통령만이 아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을 드러낸다. 우리 편이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우리 사회의 적잖은 시민들이 지니고 있다. 이것이 윤석열을 대통령까지 밀어 올린 집단 의지이다. 따라서 현 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을 내쫓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공의 장에서 살아가는 시민이자 주권자들에게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가치와 절차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등이 소개되고 강조되어 왔다. 논쟁적 사안은 논쟁적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학생들은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겉으로는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논쟁적인 이슈를 신념과 확신에 기반해서 주장하고 실천하는 사례를 적잖이 목격했다. 이런 의식과 행동의 이중성은 쉽게 간파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심층 모순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종종 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포획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와 유사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만 SNS에서 소통하니 이런 현상이 더 강화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원적 가치와 신념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야 한다. 논쟁적 문제를 논쟁적 문제로 제대로 다루고, 민주적 대화와 절차적 해결을 정착시키고, 다원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협력과 연대와 공존의 길이 열릴 것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실패는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우리 모두의 실패를 말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시민교육의 일상화를 요구한다.
생애 교육의 새로운 방향: 자존감, 공감, 민주주의 교육
지금까지 윤석열 대통령을 사례로 하여 우리 교육의 심각한 결함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요람에서 시작하여 사회인으로 그리고 공적 주체로 성장하는 여정과 관련된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교육의 방향은 인간 실존의 기초로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자존감 교육(1단계), 사회적 존재로서 내집단-외집단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감 교육(2단계), 시민이자 주권자라는 공적 존재로서 절차적 다원성을 존중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사회를 향한 실천적 능력을 배양하는 협의의 민주주의 교육(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넓게 보면 민주시민교육은 이 모든 단계를 포괄한다.
첫째, 삶의 첫 단계에서 필요한 자존감 교육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고 내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만이 타자를 환대하고 존중할 수 있다.
둘째, 사회적 존재로 입문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공감 교육이다. 사회적 존재로 입문하고 성장하면서 내집단-외집단 경계를 초월하여 공감과 연대를 확장하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서적ㆍ인지적 공감 교육과 함께 공화주의적 가치를 배워야 한다.
셋째, 상상의 공동체의 공적 존재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민주시민 교육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듯이, 민족, 국가, 지구촌 등은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이다. 이와 같이 더 넓은 상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적 가치를 내재화하고 다원화된 사회의 갈등 해결 능력을 기르고 사회적 책임을 바탕으로 사회 변혁의 주체로 참여하는 실천적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각 단계의 교육은 상호 연계되고 강화되며, 총체적인 인간 교육과 시민 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제 경쟁과 파편화된 교육을 넘어, 모든 존재가 존중받고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직도 내란 세력이 남겨 놓은 적대와 혐오가 청산되지 않은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이러한 생애 전반의 교육을 다시 성찰하고 새로운 실천을 힘차게 열어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