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나눔자료 7월호
- 여는 시 :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 교육정책 : 고교학점제 폐지가 아니라 개선(더 에듀 인터뷰, 정미라, 병점고 교사)
- 다양한 이야기 : 대입시험 끝낸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베이징 박현숙, 자유기고가)
- 걱정을 정리하는 중 : 이탈리아의 어느 선생님이 내준 여름방학 숙제 15개
- 강좌 안내 : 개념연결로 해내는 우리 아이 자기주도수학
7월 나눔자료에는 고교학점제의 다른 의견, 중국의 가오카오를 치른 수험생 부모가 바라보는 중국 청년들의 삶, 어느 이탈리아 교사의 독특한 방학숙제를 실어보았습니다. 습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지치기 쉬운 나날,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
대입시험 끝낸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박현숙(베이징, 자유기고가)
(전략)
잠시 ‘백수 신세’가 된 아들은 온종일 게임하거나 좋아하는 취미인 대형 퍼즐 맞추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산책하자고 해도 “지금은 푹 쉬는 중이니 제발 날 가만히 두라”고 한다. 잔소리 한마디 하려다가 문득 얼마 전 본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주인공 미지가 좋아하는 동창생인 호수가 잠시 백수가 됐을 때 그에게 해주는 말이다. “지나간 일은 생각해봤자 후회뿐이고 닥칠 일은 생각해봤자 불안하기만 하고. 그러니까 뭔 생각이 든다 싶으면 이 뜨개질을 해. 한코 한코 뜨면서 오늘 하루만 버티는 거야. 그렇게 버티다보면 새로운 일도 생기고. 새로운 일은 안 생기더라도 이 수세미 하나는 생기는 거지.”
그러나 학부모들은 ‘수세미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시험 끝난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학부모들이 모인 단체대화방에선 매일 ‘슬기로운 백수 시절 보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학 입학 전에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며 (단체 할인을 받기 위해) 함께 운전면허학원에 다닐 아이들을 모집한다는 내용, 입시 실패에 대비해 유학 영어 시험을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 아이들에게 세계관과 식견을 넓혀주기 위해 유럽 여행을 함께 가자거나 각 분야 유명 학자와 함께 떠나는 테마여행에 참여할 친구를 모집한다는 글 등 온갖 ‘슬기로운’ 제안이 넘쳐났다.
어느 날 한 학부모가 폭탄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3년 내내 아침 7시까지 등교해 밤 9시까지 학교에서 수감생활을 하듯 지내온 아이들이다. 이제 막 그 감옥에서 빠져나온 아이들에게 당신들은 또 무슨 인생 계획 타령을 하는 건가. 제발 아이들을 잠시라도 좀 내버려둬라.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공부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학대하는 나라에서 과연 얼마나 훌륭한 인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가? 여행도 공부처럼 해야 한다며 유명 학자들 강연을 들으며 배우고 놀라는 당신들의 창의적인 발상에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며칠 뒤면 가오카오 성적표가 나올 것이고 곳곳에서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는 아이들이 나올 것이다. 그중에 당신 아이들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제발 잠시라도 숨 좀 쉬게 내버려둬라!”
이 학부모의 글은 단체대화방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 몇 분 뒤 그는 자신이 쓴 메시지를 삭제하고 대화방에서도 탈퇴했다. 한두 시간 뒤 학부모들은 다시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시간당 200위안(약 4만원) 하는 유학 영어 강사 소개글이 가장 핫한 내용으로 떠올랐다.
(중략)
자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세대
잉신은 이들이 쓴 편지 51통을 모아 샹뱌오 교수에게 보냈고, 그 뒤 이들은 화상 원탁회의를 통해 샹뱌오 교수와 집단토론을 했다. 이 화상 원탁회의에 참석했던 청년 샤오쥔은 2018년 대학 졸업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좌절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들은 잘하는데 나만 못한다면, 나만 새로운 성과를 내지 못하면 과연 내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샹뱌오 교수는 이들이 청년들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에 ‘포획’돼 있고, 이 교육 시스템이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성공해야 한다’는 서사를 주입한다고 했다. 성공만을 전제로 하는 ‘서사’를 수용할 때는 조금만 실패하거나 낙오해도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비슷한 시스템과 서사를 강요당하는 동아시아의 중고등학생과 청년들 사이에 자살과 불안, 우울이 병적으로 유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강요된 서사에서 깨어나려면 시스템과 자신 사이에 ‘간격’, 즉 거리두기 혹은 빈틈을 만들고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간격’과 ‘작은 세계’란 예를 들면, 좋아하는 서점에 가서 쉬는 동안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보는 것, 주변 사람들과의 소규모 모임 등을 통해 돈 버는 일이나 성과 위주의 일 외에 다른 의미 있는 활동이나 대화를 해보는 것 등이다. 샹뱌오는 이들에게 말한다. “조금은 멈춰 서서, 서사에서 비켜나보라.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라고. 그러면 ‘미지의 서울’ 속 미지와 미래가 그랬듯이,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성찰이 조금씩 생겨날 것이라고.
(후략)
[출처] 한겨레21 (2025. 6. 20)
등대나눔자료 7월호
- 여는 시 :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 교육정책 : 고교학점제 폐지가 아니라 개선(더 에듀 인터뷰, 정미라, 병점고 교사)
- 다양한 이야기 : 대입시험 끝낸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베이징 박현숙, 자유기고가)
- 걱정을 정리하는 중 : 이탈리아의 어느 선생님이 내준 여름방학 숙제 15개
- 강좌 안내 : 개념연결로 해내는 우리 아이 자기주도수학
7월 나눔자료에는 고교학점제의 다른 의견, 중국의 가오카오를 치른 수험생 부모가 바라보는 중국 청년들의 삶, 어느 이탈리아 교사의 독특한 방학숙제를 실어보았습니다. 습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지치기 쉬운 나날,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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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시험 끝낸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박현숙(베이징, 자유기고가)
(전략)
잠시 ‘백수 신세’가 된 아들은 온종일 게임하거나 좋아하는 취미인 대형 퍼즐 맞추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산책하자고 해도 “지금은 푹 쉬는 중이니 제발 날 가만히 두라”고 한다. 잔소리 한마디 하려다가 문득 얼마 전 본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주인공 미지가 좋아하는 동창생인 호수가 잠시 백수가 됐을 때 그에게 해주는 말이다. “지나간 일은 생각해봤자 후회뿐이고 닥칠 일은 생각해봤자 불안하기만 하고. 그러니까 뭔 생각이 든다 싶으면 이 뜨개질을 해. 한코 한코 뜨면서 오늘 하루만 버티는 거야. 그렇게 버티다보면 새로운 일도 생기고. 새로운 일은 안 생기더라도 이 수세미 하나는 생기는 거지.”
그러나 학부모들은 ‘수세미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시험 끝난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학부모들이 모인 단체대화방에선 매일 ‘슬기로운 백수 시절 보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학 입학 전에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며 (단체 할인을 받기 위해) 함께 운전면허학원에 다닐 아이들을 모집한다는 내용, 입시 실패에 대비해 유학 영어 시험을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 아이들에게 세계관과 식견을 넓혀주기 위해 유럽 여행을 함께 가자거나 각 분야 유명 학자와 함께 떠나는 테마여행에 참여할 친구를 모집한다는 글 등 온갖 ‘슬기로운’ 제안이 넘쳐났다.
어느 날 한 학부모가 폭탄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3년 내내 아침 7시까지 등교해 밤 9시까지 학교에서 수감생활을 하듯 지내온 아이들이다. 이제 막 그 감옥에서 빠져나온 아이들에게 당신들은 또 무슨 인생 계획 타령을 하는 건가. 제발 아이들을 잠시라도 좀 내버려둬라.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공부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학대하는 나라에서 과연 얼마나 훌륭한 인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가? 여행도 공부처럼 해야 한다며 유명 학자들 강연을 들으며 배우고 놀라는 당신들의 창의적인 발상에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며칠 뒤면 가오카오 성적표가 나올 것이고 곳곳에서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는 아이들이 나올 것이다. 그중에 당신 아이들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제발 잠시라도 숨 좀 쉬게 내버려둬라!”
이 학부모의 글은 단체대화방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 몇 분 뒤 그는 자신이 쓴 메시지를 삭제하고 대화방에서도 탈퇴했다. 한두 시간 뒤 학부모들은 다시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시간당 200위안(약 4만원) 하는 유학 영어 강사 소개글이 가장 핫한 내용으로 떠올랐다.
(중략)
자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세대
잉신은 이들이 쓴 편지 51통을 모아 샹뱌오 교수에게 보냈고, 그 뒤 이들은 화상 원탁회의를 통해 샹뱌오 교수와 집단토론을 했다. 이 화상 원탁회의에 참석했던 청년 샤오쥔은 2018년 대학 졸업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좌절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들은 잘하는데 나만 못한다면, 나만 새로운 성과를 내지 못하면 과연 내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샹뱌오 교수는 이들이 청년들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에 ‘포획’돼 있고, 이 교육 시스템이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성공해야 한다’는 서사를 주입한다고 했다. 성공만을 전제로 하는 ‘서사’를 수용할 때는 조금만 실패하거나 낙오해도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비슷한 시스템과 서사를 강요당하는 동아시아의 중고등학생과 청년들 사이에 자살과 불안, 우울이 병적으로 유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강요된 서사에서 깨어나려면 시스템과 자신 사이에 ‘간격’, 즉 거리두기 혹은 빈틈을 만들고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간격’과 ‘작은 세계’란 예를 들면, 좋아하는 서점에 가서 쉬는 동안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보는 것, 주변 사람들과의 소규모 모임 등을 통해 돈 버는 일이나 성과 위주의 일 외에 다른 의미 있는 활동이나 대화를 해보는 것 등이다. 샹뱌오는 이들에게 말한다. “조금은 멈춰 서서, 서사에서 비켜나보라.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라고. 그러면 ‘미지의 서울’ 속 미지와 미래가 그랬듯이,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성찰이 조금씩 생겨날 것이라고.
(후략)
[출처] 한겨레21 (2025.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