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꿈은 물건처럼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박경아, 오주수 모자

2013년 한겨레신문에 ‘사교육 탈출’이라는 주제로 12회에 걸쳐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다. 사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학부모 회원과 자녀들 이야기부터 학원 강사, 육아 상담가, 뇌과학자 등 전문가 인터뷰가 연재되어 호응을 얻었다. 얼마 전부터, 그 당시 학생이던 회원 자녀들의 성장 후 모습이 궁금하다는 요청이 들려왔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614631.html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나야말로 성장한 회원 자녀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서는 혹시 이들이 세속적인 기준으로 ‘성공’한 모습이 아닐 때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인터뷰를 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뜻밖에도 ‘방과후 교사와 4남매’라는 제목으로 실린 박경아 회원과 큰 아들 오주수씨가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오주수 씨. 첫 인터뷰로부터 만 6년이 지난 2019년 12월, 6년 전과 같은 장소, 봉천동 아파트를 찾았다.



채송아 (이하 채) : 박경아 선생님께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이 되신 계기부터 들어볼까요?


박경아 (이하 박) : 2013년 페이스북 통해서 송인수 선생님이 쓰신 책 ‘무모한 교사들’을 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알게 됐어요. 그 해에 등대지기학교를 들었고요. 미션 수행하러 나갔더니 지역모임에서 독서모임을 겸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당시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서 외출하기 어려워 모임을 저희 집에서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이후로 우리집에서 꾸준히 모이게 됐어요.

채 : 미션 수행 하고 나서 지역모임에 안나갈 수도 있었는데, 계속 나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 :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면서 나는 점점 고갈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계속 다녔던 교회에서도 채워지지 않았고요. 내 자체의 성장도 멈춰있는 거 같았죠. 그게 책을 통해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또 저는 행동하는 성향의 사람인데,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활동이 사회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거잖아요. 지금은 그만뒀지만,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을 했던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어요. 제 아이들을 학원처럼 틀에 박힌 곳에서 억지로 가르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 모든 요구들이 다 연결된 거 같아요.


채 : 원래 가지고 계신 교육관이 저희 단체와 잘 맞았던 거네요?


박 : 제가 막연하게 갖고 있던 교육의 방향에 대해 우리 단체가 선명하게 보여준 거죠. 저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구나. 그해 큰 아들 주수는 고2였어요. 한겨레 신문 인터뷰에 나온 것처럼 연기로 진로를 막 정했을 때였죠.


채 : 주수씨는 고2 때 인터뷰하고 자그마치 6년이나 지났어요. 배우가 되겠다는 진로를 결정한 뒤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거 같아요.


오주수(오) : 연기를 시작하면서 처음 품었던 마음이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걸 열심히 해서 사람들을 웃게도 해보고, 울게도 해보자’라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연기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포부와 다르게 자만심에 빠져서 별로 열심히 안했어요. 학원에서 실기시험을 보거나 평가할 때, 저는 연습도 열심히 안했는데 열심히 한 친구들보다 칭찬을 많이 들었거든요. ‘감각이 있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보통 그런 말 들으면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더 연습해야 하잖아요. 제게는 오히려 칭찬이 독이 됐어요.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도 성실히 하지 않았고요.


"연기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게 저한테는 독이 됐어요"


채 : 연극영화과는 경쟁률도 높고 치열하기로 유명한데요.


오 : 대학입학 실기시험 볼 때, 남들 다 하는 특기 준비도 안하고 그냥 연기 딱 하나만 했어요. 그러니 전부 떨어졌죠. 그러다 체코 브루노 콘서바토리에서 한국캠퍼스를 설립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학교에 입학한 뒤로 처음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연기도 맹렬히 연습하고, 학과 일도 최선을 다하고, 작업이 많을 때면 연습실 바닥에 침낭 펴놓고 자면서 집에 못가는 날도 많았어요.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제가 하는 많은 행동이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를 기준에 놓고 나온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어요. 남들의 시선에만 신경쓰다보니 ‘원래도 잘 모르는 나’를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된 거죠. 타인의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연기가 더이상 재미있지 않았어요. 선발된 배역에서도 빼달라 하고, 스탭으로 남아서 대충 작업하고요. 사람들이 기회를 주려고 많이 다가왔는데도 저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휴학을 했죠.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에 짓눌려 연기 공부를 그만둔 이후


오 :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부터 다녀와야 할 거 같아서 입영 날짜 받아놓고 동네 술집에서 알바를 시작했어요. 그때 알바가 너무 새롭고 재밌더라고요. 사람을 대하는 것도 재밌고, 열심히 하면 사장님이 인정해주는 것도 좋고요. 다른 알바생들은 일거리가 없으면 그냥 핸드폰 보면서 쉬는데, 저는 안그랬거든요. 장사가 잘 맞는 거 같았어요. 사장님께서 계속 같이 일하지 않겠냐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일을 더 하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군대에 다녀오면 그 뒤로는 네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 믿고 지원해주겠다. 일단 군대에 가면 좋겠다.” 하셨어요.


그날 ‘나를 믿고 지원해주겠다’는 아버지 말씀에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요. 잠들 때까지 울었던 거 같아요. 군대에서는 훈련소 조교로 일했는데, 군 생활도 재미있었어요. 바깥과 단절된 채 뭘 해내거나 이뤄야 한다는 압박도 없고, 짬이 날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요. 제가 군대에서 일기를 썼거든요. 뜸해지면 다시 또 쓰고. 그러면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돌이켜보면 휴학할 무렵부터 약해질대로 약해져서 피해의식이 점점 더 커졌던 거 같아요. 스스로 계속 상처주면서요. 그런 생각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사랑하려면 뭘 해야 되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려면 내가 원하는 거를 하자, 내가 원하는 일 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일단 연기였어요. 어떻게 다시 시작하지? 부모님께 뭐라고 얘길하지? 고민 되니까 일단 원하는 걸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죠. 하지만 아무 것도 잡히는 게 없어서 억지로 찾으려고 찾은 게 연기다보니 더 맘을 못잡았던 거 같아요.


(엄마는 아들이 품었던  피해의식이 부모의 양육태도로부터 비롯된 건 아닐까 짐작해본다)

채 :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피해의식이었을까요?


오 : 타인이 저에게 좋은 뜻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전해주려할 때, 다른 의도로 얘기하는 걸 거라 생각했어요, ‘나의 이런 점이 별로니까 저렇게 얘기하는 걸 거야’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자동 필터를 갖고 있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피해의식은 있었던 거 같아요. 어떤 계기나 사건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저 혼자 하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그렇게 됐어요.


채 : 어떻게 그 마음에서 벗어났어요?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오 :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노력 중 하나가 올해 4월부터 성경을 보는 일이었어요. 성경 앱에 그날의 말씀이 나오거든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8-90%지만, 그 말씀에 지금의 나, 이전의 나, 앞으로의 나를 안정감있게 해주는 힘이 있더라고요. 나는 그 당시에 왜 그랬을까, 그때 아팠다면 왜 아팠을까.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는 왜 나보다 남을 바라보지? 남을 바라볼 시간에 나를 바라보자, 그 시간에 성경과 좋은 글귀, 좋은 책을 보자’ 하고 마음 먹게 됐어요.


원래 전 이런 얘길 못했어요. 몰랐으니까 할 수도 없었죠.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 저를 괴롭히는 생각 때문에 아팠다는 걸 아주 조금 알게 됐어요.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아팠구나. 지금도 전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엄청 많을 거 같아요.

내 안에서 자란 피해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채 : 성경은 자발적으로 보게 된 거예요?


오 : 전역하고 아버지께서 교회를 다니면 좋겠다고 권하셔서 같이 다니게 됐어요. 성경책 들고 다니기 무거우니까 핸드폰 앱을 깔았는데, 우연히 성경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지내왔을까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나는 정말 나를 모르는구나, 무슨 음식 좋아하는지, 어떤 풍경 좋아하는지야 알죠.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고, 지금의 나는 왜 이런 내가 되어 있는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나에 대해 물어보고 생각하다보니 제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성경을 되새기다보니 제가 갖고 있던 피해의식이나 남의 말을 믿지 못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조금씩 조금씩 풀렸어요. 앞으로도 이 생각과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더 괜찮아질 거라 생각해요.


주수씨는 본인에게 와 닿은 그날의 성경 구절을 정리해둔 핸드폰 메모장을 보여주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1절과 9절)’


채 : 연기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도 다녀왔는데 꿈을 버리지 않고 연기학원 다시 다닌다는 소식 전해들었을 때 무척 반가웠어요.


오 : 연기학원은 성인반인데도 분위기가 너무 소극적이고, 배울 게 없을 거 같아서 바로 그만뒀어요. 대학 다닐 때 잘 이끌어주셨던 교수님이 지금은 다른 학교에 계신데, 그 분께 5개월 정도 연기 코칭을 받았어요. 꿈을 버리지 않아서 반가웠다고 하셨는데, 꿈이라는 건 물건처럼 주워담고 버리고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추상적인 꿈이라면 어떻게 다듬어 가느냐에 따라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해진 a를 버리고 b를 선택하는 게 아닌 것 같거든요. 꿈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어요. 사업가가 될래, 연기자가 될래, 무슨 직업을 가질래가 아니라, ‘일정하고 안정적인 템포를 가지고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좋은 에너지, 선한 영향력, 그냥 멋있는 말 같기도 한데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다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됐어요.


미래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오늘 하루가 시작됐기 때문이잖아요. 오늘이 주어졌고, 그날그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요. 감사한 마음이 있으니까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무너진 날도 많아요, 계획했던 것을 안하거나, 힘들어서 안하거나, 하루 잘 살면 하루 무너지고. 그런데 전 같으면 하루 무너지고나서 다시 잘 사는 마음가짐으로 돌아오기 힘들었어요. 난 이거밖에 안되는 놈이야, 그냥 안할래로 쭈욱 갔어요. 지금은… 하루를 잘 살지 못했으면 그 날은 유한한 삶 중에 하루니까 잠깐 쉼을 선택한 거고 다음날 또 새로운 하루를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박 : 엄마를 눈물나게 하냐


오 : 왜 눈물이 나지?


박 : 아들이 한 단계 올라온 거 같아서 기분이 좋네.


채 : 스물 네 살밖에 안됐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죠?


박 : 부모가 괴롭혀서 그런가봐요.(웃음)

오 : 아버지는 가치관이 확고하신 거지, 엄격한 분은 아니에요. 제가 사춘기 때 학교에서 말썽도 부리고, 오랫동안 불편한 아버지였죠. 아들이라면 누구나 아버지가 불편할 걸요? 제대 직후엔 극악을 치닫다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저 혼자 아버지에 대해 만든 오해들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사랑하거나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요. 형편이 어려워서 일하느라 바쁘시니까 자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무뚝뚝하셔서 더 그렇게 느꼈던 거 같아요. 지금도 표현방식은 변함없으시죠. 그런데, 아버지의 행동을 바라보니 나름대로 표현하고 노력하신 거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아버지가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요.


어렸을 때 아버지랑 산에 많이 갔는데, 최근에 다시 가게 됐어요. 내려와서 같이 밥 먹으면서 술도 마시고요. 솔직한 마음도 이야기하고 조금씩 괜찮아지는 거 같아요. 지난 여름에 온가족이 제주도에 갔을 때가 정말 좋았어요. 가족들과 여행다운 여행을 가본 게 처음인 거 같아요.


박 : 셋째 전공이 레저해양스포츠학과니까 제주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둘째가 입대하기 직전이라, 다같이 제주도에서 2박3일을 보낸 거죠. 남편 일 때문에 우리 가족은 보통 1박2일 여행밖에 못가는데, 처음으로 2박3일을 다녀왔어요.


오 : 2박 3일 동안 10이 기쁘면 20으로 표현하고, 분위기가 딱딱하다 싶으면 풀어주려고 노력했어요. 더 많이 웃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더라고요. 전에는 잘 안웃고 굳어 있었거든요. 여행 마지막 날, 아버지가 형 역할을 해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갔다 와서 또 말씀하시고요. 제가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말씀드렸더니, 그 역시 고맙다 하시더라고요.

삶에 대한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어요


채 : 오랫동안 고민이 축적돼서 변화가 생겼겠지만,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삶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는 게 놀랍네요. 그러면 지금 연기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오 : 연기에 대한 가능성이 닫혀있는 건 아닌데, 현실적으로는 일을 하려고 해요. 아버지 택배회사에 다시 들어가서 일하고 있어요. 지금 나라는 사람은 일을 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해요. 나이나 능력을 떠나서 일을 하면서 어떤 나로 지낼까 생각해보고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생각을 정리한 지 얼마 안되었어요. 앞으로 점점 더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채 :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면 힘든 점은 없어요? 집에서 보는 아버지와 다를 거 같은데요.


박 : 같이 일하는 분들이 50명이 넘거든요. 업무나 관계에 대한 부담도 있을 거 같아요.


오 : 그런 부담은 별로 없어요. 나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모르는 점은 알아가면 되니까요. 몸은 좀 힘들지만 배울 점도 있고요. 아버지가 회사에서 크게 다른 점은 없어요. 가끔 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제가 깔짝깔짝하고 있는 고민을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깊이 하셨던 걸 알 수 있어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경아 회원님은 주수씨가 연기학원에 안다니는 지도 몰랐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 은선이 빼고 아들 셋은 이미 스무 살이 넘었으니 엄마가 관여할 나이가 아니라 알아서 잘 하고 있으려니 믿으셨다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믿는 만큼 자란다는 얘기는 수백 번 들어왔지만, 부모의 믿음 대로 자라 있는 한 사람을 지금 내 눈 앞에서 보고 있다. 그 사람은 자기 부모의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 너머에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내면과 분투하다 상처입은 자신을 이제 막 회복하는 중이다. 이 순간, 제일 부럽고 존경스러운 주수 씨 어머니, 박경아 회원에게로 화제를 옮겨보았다.

채 : 단체 활동을 하면서 양육자로서 받은 영향이랄까 가장 큰 변화는 어떤 것인가요?


박 : 직접적으로 나를 변화시켰다기보다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아이들한테 증명해줬죠. 흔들릴 때마다 저를 붙잡아줬고요. 정책에 대해서는 들어도 이해가 잘 안되고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정책 제안 자리에 참여를 요청하시면 회원 머릿 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가지만요.


채 : 2013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역모임에 참여하고 계신데 힘든 점은 없으신가요?


박 : 이 모임이 언제까지 유효할까, 별 도움 안되는 시점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고민은 돼요. 제가 이 모임에서 배우고 자랐는데, 아직은 의미있다고 느끼고 꾸준히 모이는 사람들이 10명이나 돼요. 올 가을에 ‘송인수가 간다’ 1회를 저희집에서 했어요. 그 기회를 통해 올해 한 분이 늘어난 거예요. 어디에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거죠. 왔다가 나가신 분도 계시지만, 맨 처음에는 5명이 모였다가 2배가 되었어요. 제 친구인데 싱글인 사람도 와요. 이 친구 입장에선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보는 기회가 된 거죠.

(* 송인수가 간다 : 입시고통없는세상을 위해 11년간 달려온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철학, 활동과 성과,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는 전국순회토크)


(2019년 11월, '송인수가 간다', 관악등대지역모임 회원들과)

채 : 주변 분들에게 단체 활동이나 사업을 어떻게 권하세요? 전 그게 참 어렵던데요.


박 : 저희 지역모임에 나오시는 분들 중 5명이 제가 권유해서 오셨어요. 제 아이들이 많이 컸으니까 주변 엄마들이 부모로서 겪는 고민을 먼저 와서 토로해요. 그런 얘기 들을 때 나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 나오면 훌륭한 분이 많아서 그 분들 이야기 들으면 도움이 되고, 같이 읽는 책을 통해서도 배우게 된다는 경험을 들려주죠. 막내 은선이가 다니는 공부방 선생님도 사교육 종사자지만 늘 고민스럽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모임에 나와 보시라 청했어요. 사교육 없는 세상 아니고 ‘걱정’ 없는 세상이라고요.


채 : 언제였던가, 남편을 매우 존경한다고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두 분의 자녀 양육에 대한 태도나 철학이 비슷하신가요?


박 : 저희는 지금도 끊임없이 싸우는 부부거든요. 그 사람도 안변하고 나도 안변하지만, 여전히 존경하는 점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 나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연애할 때도 그런 점에 끌려서 좋아하게 됐는데, 지금도 한결같아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행보가 늘 타인을 향해 있는 점이 존경스러워요.

채 : 남편 분의 그런 면모가 드러나는 일화를 구체적으로 들려주신다면요.


박 : 저희 부부가 두레마을에서 만났어요. 타자지향적인 삶을 지향하는 청년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죠. 막상 결혼하니까, 늘 타인을 향해 열려있고

내 걸 포기해야 하는 남편이 싫을 때도 많았어요. 택배회사를 시작한 이유도 공동체 후배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시작한 거예요. 인연이 되는 사람들 챙기느라 시작한 게 지금까지 온 거에요. 20년 다 돼가요. 그때 후배들은 지금 아무도 없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소모품으로 대하지 않는 것, 또 본인은 자세히 모르지만 저한테 대략 들은 것만으로 우리 단체 일을 중요한 운동이라 동의하고 기꺼이 '텐텐클럽(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위해 월 10만원 이상씩 후원하는 회원 그룹)'에 가입해준 것도 고마운 일이죠.


오 : 아버지는 나이 들면 흙집을 지으러 다니신대요. 지금 택배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노후를 맞았을 때 같이 흙집을 지어서 살면 한결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세요. 타인을 향해 열려있는 두 번째 꿈인 거죠.


박 : 55세에 택배 일을 시작하신 분이 10년 일하셔서 올해 65세가 되셨어요. 같이 일하는 택배기사들 중에서 최고령이시죠. 10년 근속 기념으로 80만원짜리 부부동반 제주여행 패키지 상품을 선물해드렸어요. 그걸 해드리고 저희 부부가 너무 행복해했어요. 우리가 이런 것도 했구나, 택배기사들에게도 작지만 복지 혜택이 주어질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은 게 남편 바람이에요.



이런 마음과 실천을 하며 사는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내가 이들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같은 공동체에서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긍지가 솟아오른다. 이 겨울, 무정한 도시의 밤 공기 속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고, 좋은 에너지와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오늘, 또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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