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있는공부] 영어 도서관 그만 둔 어느 도서관장 이야기

사교육걱정없는세상
202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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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힐링 공간. 오랫동안 삶의 한 켠에 마음 맞는 지인들과 의기투합하여 공작을 도모할 수 있는, 오순도순 위로가 될 공간을
갖는 꿈이 있었다. 현실은 서울 어느 자락에 내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데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일산에서 마을 도서관을 운영하신다는 한지연 회원님의 이름을 흘려듣지 않았던 이유가.
단체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 학부모 대표로 발표하시던 모습을 먼 발치서 바라보다가 내 오랜 꿈을 이미 살고 계신 그분의 공간,
가족인문학도서관 ‘북트리’로 향했다.

4월 6일, 고양시 정발산동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한지연 관장을 만났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외관에서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선영(이하 ‘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펼쳐볼 수 있는 이런 공간을 어떻게 운영하게 되셨을까 무척 궁금했어요.
한지연(이하 ‘한’):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일을 줄여야 했어요. 제가 시사영어사에서 
‘신기한 영어나라’를 가르치면서 실제 영어와 학교 영어가 너무 다르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공동체 안에서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며 문화를 익혀서 영어가 자신의 개성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공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어도서관을 운영하게 되었어요. 

전: 그러면 강사를 하시면서 비판의식이 생겨 영어공부를 독서로 접목시키고자 도서관을 여신 건가요?
한: 여러 동기 중 하나는 그렇고요.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영어공부를 왜 시킬까라는 것도 의문이었어요. 영어는 하나의 언어이고 
문화인데 왜 전국에서 너도나도 다 하는 걸까? 실제의 영어교육은 어떻지? 영어 도서관 안에서 다양한 책 읽기 프로그램도 하고 
부모님들 얘기도 들어보자. 제가 도서관학과를 나왔고 나중에 영어를 더 공부하기도 했고요, 영어를 배우려면 책과 영상 자료부터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작했어요. 


정복 대상으로 전락한 영어를 되살리기

전: 영어 도서관을 통한 영어 공부가 생각처럼 효과적이었나요?
한: 이 도서관을 2001년에 준비해서 2002년에 등록했으니까, 그때 한창 인기가 많았던 솔빛영어, 잠수네, 쑥쑥 등 엄마표 영어가 
태동하던 시기였어요. 그런 영어공부 붐을 바라보며 영어가 지나치게 열심히 해야 되는 공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영어도서관 안에서 공동체로 모인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영어를 정복해야 할 대상, 꼭 사야 될 명품 가방이나 사회적 위치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 같았죠. 사실은 자기의 진로에 발판이 되어 줄 도구 정도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시간 낭비, 돈 낭비,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청춘을 저당 잡히는 동안, 학교에서는 왜 영어를 제대로 안 가르칠까가 
제겐 큰 의문이었어요. 왜 안 되는 거지? 그런데,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시간 낭비, 돈 낭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지 오래인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자화상을 익히 알기에, 자분자분 전해지는 메시지의
파장이 잔잔하지만은 않았다. 이쯤 되니 본인이 영어공부를 매개로 수많은 부모와 자녀를 만나고, 그 현장 안에서 길어낸
영어공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진단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한: 처음 도서관을 오픈할 때 공부 똑똑이가 아니라 세상 똑똑이로 키우라는 칼럼을 읽었어요. 제가 그 칼럼을 읽으면서 
“앞으로 이 세상은 달라진다. 세상 똑똑이를 만들자.”는 마음이었죠. 저는 그렇게 안 컸고 우리 아이들은 대안학교를 보내지 못하지만, 대안적인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보고자 여기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시스템에서 모든 교육은 
입시로 귀결되더라고요. 그 제도 안에서 이러저러한 노력을 해보지만 페어플레이를 하는 게 아니라 정보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선점하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전: 영어도서관이라는 공동체도 결국은 자녀들의 입시를 위한 공부, 성적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망하신 거네요.
한: 영어공부 자체가 문제라거나 공동체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큰아이를 대학 보내면서 깨달은 것이 많았어요. 
그래서 김상봉 교수님 책도 보고 국립대 네트워크에 대한 책도 보면서 우리나라는 의지가 없구나,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뚜렷하고 분명하며 세부적인 계획이 없구나, 철학도 없는 교육에 아이들이 소비되고 있구나. 소모품이 된 건 엘리트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의미에서 사교육걱정이 추진하는 대학입학보장제가 교육의 큰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이런저런 시도를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거든요.


나와 너무나 다른 존재, 자식을 키운다는 것

전: 교육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키운 자녀분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엄마의 이런 성찰이 자녀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큰 아이는 영문학을 하고 있다 하셨고, 막내는 중3이라 하셨는데, 아이를 키우시면서 그래도 내가 이것만은 잘했다, 이런 부분은
정말 힘들었다 할 만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한: 수많은 유혹에서 항상 사교육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는데 제가 발 빠르지 못한 게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학원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아이에게 이야기했죠.  친구 엄마들이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수학 선행을 해야 한다던데, 어떻게 할 거냐고요. 자기는 야성을 잃기 싫대요. 제가 사교육을 지양하는 부분도 있지만 제 주관대로 안 시켰다기보다 
아이가 안 하겠다는데 설득해서 시키는 걸 잘 못하고, 아이가 설득될 단계도 아니어서 그 의견을 들어줬던 게 잘한 일이네요. 

동병상련! 아직까지 아이와 성적이나 학원 문제로 실랑이하는 불상사는 모면하였으나, 그 이유는 내가 지향하는 교육의 가치가
확고해서라기보다 치열한 협상과는 거리가 멀고 부지런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 여기기에 한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닿았다.
그러면 남다른 고민과 성찰의 시간을 통해 자녀를 키우시는 선생님의 육아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3월 22일, 대학입학보장제 실현 운동 출범식에 참여하며...


한: 가장 힘들었던 건 제 착각이었는데 저희 아이들이 저와 같은 줄 알았어요.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 아이도 느낄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뒤늦게 깨달았어요. 아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프레임이 있더라고요.  우리 큰 아이 같은 경우 생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세상을 보더라고요. 제게 없는 부분이죠. 나와 매우 다른 존재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부모가 나와 아이를 분리하는 시간이 어느 날 ‘짠!’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과정 자체가 부모로부터 분리 과정이
아닐까. 전 거창고 교장이셨던 전성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아이는 젖을 떼고 가는데 부모가 젖을 못 떼고 있다’는 표현이
기막히도록 적확하다. 나 역시 품에서 떠나고 있는 아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은 초라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심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부모로서 큰 성장통이었으리라.

한: 부모로서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나를 뒤돌아 보고 내가 왜 힘든지 깊이 사고해야죠. 저도 관계에서 많이 배웠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교육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끊임없이 관계를 배워가는 거죠. 도서관을 하면서 배운 것도 커요. 
많은 분들과 깊은 관계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제 자신을 보게 된 거예요. 내가 저런 모습이구나. 아직도 아이를 위한다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결국은 남의 이목을 신경 쓰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아이를 통해 쟁취하려 하는구나. 타인의 모습을 통해 
제 자신의 모습을 봤고, 관계가 힘들어지면 내 자신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러고 보면 저희 도서관은 저한테 성장의 학교였고 부모로서 제 모습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준 원동력인 것 같아요.  


영어도서관에서 인문학 도서관으로, 그리고 또 다른 변화를 꿈꾸며

전: 영어도서관으로 시작하셨는데 지금은 가족 인문학 도서관으로 바꾸셨네요. 가족 중심의 도서관 컨셉이 짐작이 돼요.
영어교육과 다른 가치를 실현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한: 처음에는 영어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 끝은 입시로 변질됐어요. 거기에 대한 회의가 컸어요. 
그러다 가족 인문학 도서관을 하자고 우리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얘기해서 바꿨는데 객관적으로 떨어져서 보니, 
이 또한 사회에서 인문학을 필요로 하니 아이들한테 인문학 사교육을 시작하자는 거더라고요. 
그럼 우리 끝은 뭐야. 인문학이니 교육이니 말하지만 항상 애들이 어떻게 하면 대학을 잘 갈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까로 귀결되더라는 거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북트리도서관


전: 영어도서관으로 시작했는데 인문학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트렌드를 쫓아서 변화하게 된 거군요. 사실 ‘가족 인문학 도서관’
이라고 해서 가족과 인문학을 매칭 한 게 되게 멋지게 보였거든요.
한: 멋졌어요, 제가 보기에도. 지식을 추구하는 지점에서 인문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터닝한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큰 배에 타고 있잖아요.  누군가 다른 방향을 생각하더라도 전체적인 배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그냥 거기에서 거기를 맴돌아요. 물론 ‘가족 인문학 도서관’ 너무 좋죠. 아빠도 오고 엄마도 오고 같은 강의를 심층적으로 듣고. 
근데 자세히 보니까 교묘하게 아이들을 교육시키자는 미명하에  가족이 들러리가 된 거예요. 
도서관 구성원들끼리 이건 아니지 않냐, 그만하자고 했어요. 

전: 그러면 지금 현재 이 도서관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고 계신 건가요?
한: 아이들 프로그램은 없어졌고요. 이제 아이들에게 공부 같은 것 그만 시키자. 쓸데없는 교육이라 치부할 수 없지만 근본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고, 토막만 딱 내서 ‘요거 먹으면 좋아’ 방식의 교육은 그만 시키자. 
이후로 ‘우리나라가 살려면 여성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머리만 쓰는 것 이제 그만하자. 
손으로 만드는 것, 같이 모이는 것, 이런 활동은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 여유롭게 와서 가족이 즐길 수 있거든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자유롭게 공동체로 모여서 삶의 지혜를 나누는 방식의 운영을 지향하고 있어요. 

한지연 선생님


전: 이제는 ‘배우는 곳’에서 ‘모여서 나누는 곳’으로 바뀐 셈이네요. 공부 모임은 전혀 없나요?
한: 누구든지 같이 모여서 스터디해요. 너무 심각하고 어려운 영어 말고, ‘어린 왕자’나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원서를 읽어본다든지. 책을 읽으면서 같이 감동을 나누는 걸 중심으로 진행해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인문학의 목표가 아닐까요. 
감정이 살아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나다워지는 공동체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좋겠어요. 


함께 해서 행복하고, 함께 해서 더 멀리 간다

오늘 해주신 말씀을 들으며 제 안의 걱정과 불안이 사라진다고 할까마음이 평안해지는 심리치료를 받은 느낌이 들어요.
이 글을 읽는 부모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아이들이 자기다움을 찾고 공동체에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배우는 것이 기성세대들이 해줘야 할 몫이에요. 제가 영어 도서관을 10년 하고 지금은 가족 인문학 도서관을 하지만책을 같이 읽고 나누는 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퍼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생명력이 없을 거예요그래서 우리 단체가 해야 할 몫이 굉장히 크죠교육의 거버넌스라고 할까요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우리 단체가 대입제도의 변화까지 이끌어냈으면 좋겠어요책을 읽고 행동하고 공동체 의식을 성장시키는
교육이 회복되도록 작은 도서관 같은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도 발전해야죠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 같이 어울려서 삶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요혼자도 행복하지만 공동체의 힘이 굉장히 크더라고요그걸 작은 도서관 하면서 느꼈어요.
혼자는 할 수 없어요. ‘함께 해서 더 멀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함께라서 행복하고함께라서 힘이 되고함께라서 해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북트리 도서관

대학입학보장제를 완성해가는 토론회에 학부모 논찬자로 참석해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성장하며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산다그 이름 중에 나를 최고의 기쁨에 올린 이름을 꼽으라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엄마라고 답할 수 있다그렇다 해도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난도의 여정인지 부정하기 어렵다.
한지연 회원님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 한 인간이 부모라는 이름을 통해 성장하며 감내한 고통의 깊이를 공감하면서 더 많은 부모가
그녀처럼 치열한 성장통을 딛고 진화했더라면 지금쯤 우리 교육의 병폐도 치료 단계에 있지 않았을까.
교육의 회복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꿈꾸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 더 멀리 더 오래’ 버틸 힘을 키우는 그녀와 따로 또 같이
공유할 시공간에 기대를 건다긴 겨울 땅 속에서 기다리는 봄의 씨앗들은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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