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발견] 밥집 아저씨 된 바리스타 - 김지곤

오늘의 주인공 김지곤 바하밥집 총괄관리실장, 

“아 처음 오셨어요. 남은 음식은 저기에 버리시면 되요”

“이 거 다 못 드시잖아. 모자라면 더 드릴 테니까 우선 밥 이것만 가져가요.”

이제 주걱을 직접 드는 일은 많지 않다. 대신 이곳저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쉼 없이 손님들을 챙긴다. 그러다 잠시 짬이 나면 흐뭇하게 오늘 처음 주걱을 잡은 6년 전의 자신을 바라본다. 

밥이 잘 섞이도록 한 뒤 식판마다 적당하게 밥을 담는 일. 보기엔 쉬운 것 같지만 이것에도 노하우가 있다. 식판을 든 줄이 얼마나 이어져 있는지 밥통에 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6년 전 배식 봉사자로 바하밥집을 처음 찾았던 김지곤(37, 바하밥집 총괄관리실장)씨는 이제 관리자가 되어 돈 대신 사랑이 오가는 이 밥집 이 곳 저 곳을 챙기고 있다. 


봉사를 위해 찾았던 곳이 이제 평생 일터가 된 것이다. 그의 지난 이력들에서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을 추론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할 때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1월 초 어느 날,  근처 자리잡은 ‘카페 브룩스’로 안내한다. 카페 브룩스란 바하밥집에서 운영하는, 수익금은 전액 노숙자 자활을 위해 쓰는 카페다. 도착하니 점심시간도 지나고 저녁 배식시간(6시)이 될 때까지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보니 나름 길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바하밥집 벽에서는 ‘브룩스가 여기 있다(Brooks is here)’란 문구를 볼 수 있다. 감옥생활을 다룬 영화 ‘쇼생크 탈출’의 인물 브룩스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한 후 적응을 못하고 모텔에서 자살하며 ‘브룩스가 여기 있었다(Brooks was here)’란 문구를 유서로 남겼다.)


바하밥집이란?

도시 주변에 소외된 이웃에서 따뜻한 밥 한 끼 제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분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새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단체입니다. 거리의 노숙인들 가정불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정신적 아픔을 겪는 분들, 결손가정의 아이들과 독거노인까지 우리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분과 함께 합니다.  (바하밥집 홈페이지 : https://www.bahameal.net/)


김지곤 실장은 실제 바리스타로 일한 경험이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하 노) : 직업의 발견 두 번째 인터뷰 주인공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좀 한가한 것 같은데? (웃음)

김지곤(이하 김) : 아 원래 사무실에서 처리할 일이 있는데 여기 카페 근무하던 친구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입원하는 바람에 대신 지키고 있어요. 중간 중간에 손님 오면 잠깐 중지하고 주문 받아야 하니 대답하다가 갑자기 계산하러 가도 이해해요 (웃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갈린 원두 200g 사러 오신 손님 한 분만 왔다 가셨다.)


비오면 오락실 비 안 오면 농구골대

노 : 일단 어린 시절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할게요. 태어난 곳이 어디에요? 가족 관계는요?

김 :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순창이에요. 정확히는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입니다. 3녀 2남 중 넷째에요. 누나가 셋이지요. 네 살 때까지 거기 살다가 서울로 가족 전체가 올라왔어요. 그래서 순창에 대한 기억은 명절 때 할아버지, 할머니 뵈러 갔을 때 기억뿐이에요.


서울 올라와서 정착한 곳은 성동구 옥수동인데 지금이야 몰라보게 발전이 되었지만 그 땐 참 못 사는 동네였다고 한다. 서울에 무작정 올라와서 자리 잡은 거라 부모님 두 분 모두 참 열심히 일하셔야 했다고 그렇게 한 달 한 달 버티는 살림이었다고 회상했다. 


노 :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김 : 특별할 게 없는 아이였어요. 딱히 공부를 막 시키는 분위기가 아닌 동네기도 하고 해서 친구들하고 노는 게 일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공부를 시키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안 되는 집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 친구들 생각하면.....옥수역 바로 다음 역이 압구정역인데... 사는 모습은 참 달랐던 것 같아요. 


노 : 공부와는 거리가 먼?

김 :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중학교 3학년 때 딱 한 번 정말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떤 심정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막 스파르타식으로 강하게 관리하는 학원에 제가 스스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노 :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진 겁니까?

김 : 그건 아니고...나 하나 저도 모르게 위기를 느꼈다고 해야 하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누나 세 명은 전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 했어요. 집안 분위기가 저는 꼭 대학에 보낸다는 쪽이었거든요. 그래서 한 번 해보자 하고 나름 열심히 했어요. 아들은 제 동생도 있는데 아마 장남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성적도 꽤 괜찮게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고등학교 입학 때 성적도 나쁘지 않았어요. 

  

노 : 아 그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이후로 죽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웃음)

김 : 그런데 고등학교 가서 첫 시험 보는데 잘 하는 애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고1 중간고사 보고 성적 보고 바로 느꼈지요. 그래서 그냥 별 특징 없는 학생으로 3년을 보냈어요. 날이 좋으면 농구하러 가고 비 오면 오락실 가고 그렇게 보낸 것 같아요. 90년대 중후반에 고등학교 다닌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 저랑 같지 않았을까요? (웃음)

배식 천막에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등 다는 김지곤 실장

그렇게 수학능력시험을 망친 그는 재수를 결심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가족 중에 한 명도 대학 나온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장남이라고 대학 가는 것을 봐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고 해서 한 번만 더 해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열심히 한 덕분인지 나름 성적은 올랐다. 그는 1년 전 기억을 살려 이름을 들어본 대학의 경영학 혹은 경제학과에 지원한다. 

경영, 경제 그런 데 나와야.....

노 : 원래 경영학이나 경제학. 그러니까 상경계열 쪽 학과에 관심이 많았던 건가요? 결과는요?

김 : 그게 또 웃지 못할 사연이 있는데요. 고3때 본 수능이랑 재수할 때 본 시험이랑 난이도 차이가 좀 있었어요. 재수할 때가 많이 쉬워졌어요. 그걸 몰랐던 거예요. 바보 같았지요. 시험이 쉬웠으면  당연히 다르게 지원해야 하는 건데,. 뭐 정보도 없고 주위에 대입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그냥 작년 기준으로 넣으면 되는 줄 알고....당연히 떨어졌지요. 경영이나 경제학과에 넣은 건요. 거기 가야 대기업 들어가기 쉬운 줄 알았어요. 그냥 그런 과들 많이 뽑는다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노 : 그런데 전문대 지원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김 : 4년제 넣고 그냥 멍하게 있는데 친구들이 전문대 원서 넣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지원하지만 그 땐 직접 학교에 찾아가서 넣어야 했거든요. 그 때 어떤 학교에 찾아갔는데 친구가 그냥 뭐 일단 넣고 붙고 나서도 마음에 안 들면 안 가면 되지 않냐고 해서...

  

노 : 그래서?

김 : 넣었어요. 그 때 제 점수가 전문대 지원하기엔 좀 넉넉했거든요. 그래서 붙었고요. 전공은 인테리어였는데 나름 재미있었어요. 

  

학업과 군복무를 마치고 그에게도 스스로 밥벌이를 책임져야 할 시기가 찾아온다. 형편 탓에 안정적 직장을 구하기 위한 시험 준비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거나 유학을 떠나는 것 자체가 남의 이야기였으므로 20대 중반을 지나자마자 바로 생업전선에 뛰어든다.  처음에는 대부분 동기들처럼 인테리어 관련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리 오래 다니지 못하고 여러 번 직장을 옮겼다. 서른 문턱까지 몇 해 동안 조명 회사 사원, 텔레마케터, 바리스타 등 서로 관련성을 찾기 힘든 직업들이 그를 스쳐갔다. 


노 : 어떻게 바로바로 일이 구해졌네요? (웃음)

김 :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사실 안정적이지 않은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음에도 안 맞고 또 내부적으로 일하다가 갈등도 생기고 하니까 오래 다니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원래 결정이 빨라요. 그리고 두 번 생각하지 않아요. 

  

노 : 그래도 지금까지 스쳐온 일들 사이에 연관성이랄까 그런 건 솔직히 없는 것 같아요. 그 때 직업의 의미는 뭐였을까요?

김 : 당연히 먹고 살기 위해서 그냥 다녔던 거지요. 그 때 하던 일이 가치가 없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노 : 않았는데?

김 : 보람이나 그런 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일수도 있는데 대학 졸업하고 취업할 때까지 진짜 내가 뭘 하면 행복할지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어요. 

  

노 : 그 때까지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로 이해해도 되나요?

김 : 예 그렇지요. 그냥 하루하루 살다보니 그런 기회를 가지기가 힘들지요.. 후회가 되기는 하는데 뭐 돌아가도 그 상황이라면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을까요? 

  

뜸이 들어야 밥이 제대로 되는 것처럼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할 기회도 생긴 것 같다며 돌아가도 별반 다를 것 없다는 그. 그에게 김연아가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따고 천안함이 가라앉던 2010년,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온다.

카페 브룩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바로 옆 가게가 만두동네다.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흙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천지인 ‘청계천8가’ 중에서)


청계천의 동쪽 끝자락 청계 8가 근처, 아직 서울 지하철 1호선이 1974년 개통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그곳의 풍경도 그 시절과 닮아 있다. 개발 바람이 피해갈 수는 없어 점점 높은 건물이 많아지지만 그것이 남의 이야기인 사람도 계속 많아진다. 김지곤씨가 일하는 바하밥집은 청계천 8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용한 노래 가사처럼 이름을 듣기만 해도 땀 냄새가 날 것 같은 그런 동네. 

  

서른을 갓 넘긴 6년 전, 당시 사귀던 사람의 소개로 서울 신설동 소재 나들목 교회에 오게 되었고 광고 시간을 통해 바하밥집을 만난다. (바하밥집은 나들목교회 변혁사역센터와 함께 한다.) 그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노 : 이제 겨우 이곳 이야기 근처까지 왔네요. 그래서 그 후엔 어찌 지냈어요?

김 : 2000년대 후반에 있던 돈 전부 모아서 홍대에서 카페를 시작했어요. 나름 장사도 잘 되고 단골손님도 늘고 그랬는데 건물주가 월세 올린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서 급하게 정리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더라고요. 전 거기서 커피 만들고 있었는데 또 백수가 된 거지요. 

  

그 때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마음 못 잡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교회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갔지요. 그리고 광고 시간을 통해 노숙자 분들한테 배식하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노 : 밥집과의 첫 만남이군요. 

김 : 예.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밥집에 가고 싶더라고요. 배식 봉사 시작했는데 그 때 그냥 밥만 퍼드리는 게 다였어요. 배식 시간이 화,목 저녁 6시랑 토요일 오전이었는데 사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오기 힘든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그 때 저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그리고 뭐랄까 그동안 막연히 생각만 해오던 일을 실제로 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요. 


바하밥집에는 매주 계속해서 새로운 김지곤이 등장한다. 예배 시간 공지를 듣고 오기도 하고 언론 기사를 보고, 또 지인의 소개로 밥집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사람도 몇 년 전 주걱을 잡은 적이 있다. 봉사자 중 한 명에서 이젠 밥집 살림을 책임지는 일을 하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노 : 봉사가 직업이 된 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 것 같은데?

김 : 아 예. 그 왜 우리 손님들이 식사 다 하시고 나면 잔반통에 남은 음식을 넣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봉사간 날인데 손님 한 분이 거기에 식판을 좀 세게 털다가 우리 파란천막에 김치 국물이 튄 거예요. 근데 김치 국물이 잘 안 지워지잖아요. 그런데..


노 : 그런데?

김 : 그 김치 국물 묻은 게 자꾸 신경 쓰이더라고요. 꼭 제 가게에 벽에 얼룩이 진 것 같고...그래서 세제 가져다가 막 문질렀지요. 그 모습을 현일 형님(바하밥집 김현일 대표)이 보셨나봐요. 그리고 며칠 있다가 부르시더니 같이 일을 하는 방향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 그 때 상황을 듣고자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와 미니 전화 인터뷰를 했다. 김현일 대표 이야기다.     

“사실 노숙자 배식 봉사라고 하면 가끔 하는 경험으로 생각하기가 쉽지요. 그래서 천막에 그렇게 김치 국물 튀는 것까지 신경 쓰기가 쉽지 않은데 그걸 쭈그려 앉아서 닦고 있는 걸 보고 아 이 일을 그냥 색다른 경험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구나. 느끼고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지요. 제가 지금까지 겪은 김지곤이라는 사람은 머리가 아닌 행동을 통해 배우고 그것을 통해 결정하고 결정하면 쉽게 뜻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에요. 서른 지나서 그렇게 결단 내리기 쉽지 않은데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저 처음 볼 때랑 얼굴 표정 비교해 보면 많이 편안해졌어요. 너무 보기 좋아요”


노 : 그래서요?

김 : 사실 그 이야기 전부터 현일 형님과는 가정교회 모임도 같이 하고 제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또 밥집이 너무 좋았기에 제안해 주신 건 너무 감사했는데요. 그 때 어느 커피숍 매니저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들어온 상황이라 또 고민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카페 브룩스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위치한 바하밥집 사무실.

그 때 커피숍 매니저를 선택하지 않고 밥집에 남기로 한 것은 일과 삶이 나뉘어 져 있던 삶에서 하나로 합쳐진 삶으로의 중요한 선택이었다. 


노 : 결국 봉사자로 처음 방문했다가 새로운 직장으로 바하밥집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후회는 없었나요?

김 : 물론 커피숍 매니저를 선택했다면 돈도 많이 벌고 또 다른 곳으로 좋은 조건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도 왔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제 생활이 다시 깨지게 되거든요. 

  

노 :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김 : 카페는 주말에 장사가 잘 되니까 일요일에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그럼 교회도 못 다니고 겨우 제가 만들어 놓은 생활 리듬이 깨지게 되고 또 가정교회 모임도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밥집에서 일하면 제 마음이 좋을 것 같은 거예요.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 대신에 어떻게 저 분들 한 끼라도 잘 먹일지를 고민하게 되니까요. 그렇다보니 일하는 내내 마음이 편해요. 

  

전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런 광고 문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저한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예요. 일주일 동안 하고 싶지 않고 재미도 없는 일을 돈 때문에 강제로 한 게 억울해서 떠나는 거잖아요? 전 그 분들에게는 ‘직업’이라는 게 감정을 숨기고 그냥 되게 어른스러운 것처럼 연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사람이라는 게 기쁘면 웃고 슬프면 웃고 또 짜증나면 짜증도 내고 그러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이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런 감정 풀이가 다 되요. 일하면서 웃고 우는 거지요. 그래서 주말이 되면 소중한 사람들과 이야기 하나 더 하고 싶지 막 떠난다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바하밥집 사무실 한 켠에 쌓여있는 쌀들.

노 : 경제적으로 힘들지는 않나요? 바로 1년 반 전에 결혼했고 아기도 태어나서 돈 들어갈 일이 많을텐데... 혹시 맞벌이? (웃음)

김 : 물론 보통 사람 기준으로 보면 저 금액으로 어떻게 살까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기준을 달리 하니 별로 힘든 줄 모르겠어요. 남들 의식하지 않고 진짜 필요한 것만 쓰고 또 밥집 식구들, 가정교회 식구들 다 근처에 모여살다보니 우리 식구만 떨어져 살았으면 돈을 써야 할 일을 돈 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맞벌이냐고 물어봤는데 (웃음) 결혼 전에 아기 엄마한테 어차피 우리 아기 가질 것이고 엄마가 어릴 때 사랑을 집중적으로 줄 시간이 필요하다고 서로 이야기하고 와이프는 직장 그만 두기로 합의했어요. 그래서 지금 저 혼자 벌어요. 

  

노 : 마지막 질문이에요.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해요?

김 : 예 너무 좋아요. 돈을 많이 벌거나 일이 편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삶과 일이 나뉘어 지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남기면서 살아간다는 게 너무 좋아요. 

  

인터뷰 마치고 나오는 길, 바로 옆 주방에서는 1시간 뒤 시작될 배식 준비가 한창이고 노숙자들 자활 돕는 카페브룩스 드립 커피 향기와 만두동네 찐 만두 향기가 어우러졌다. 그 향기를 만드는 사람 김지곤 씨의 미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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