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얼마나 있을 거예요?”
“응 오래 있어야지. 가능한 한 오래 있을 거야.”
“치... 처음엔 다들 그랬어요.”
“지금까지 가장 오래 계신 분이 얼마나 계셨는데?”
“8개월이오. 가장 오래 계신 분이 8개월 계셨어요.”
“그래...? 그럼 난 9개월은 있을게.”
그 9개월이 120개월이 되었다. 당시 스물일곱 햇병아리 교사 홍현우 씨는 이제 10년차 대안학교 선생님이다. 그가 일하는 꿈터학교는 가정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찜해 놓고 사랑하자’는 모토 아래 함께 살면서 배우는 가정형 대안학교다. 아이들에게 홍현우 선생님은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님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다. 서울 암사동에 있는 꿈터학교는 일반 가정집을 교사(敎舍)로 쓰고 있어 대문에 달린 간판이 아니었다면 다른 집과 구별 되지 않는다. 꿈터학교는 집이며 또한 학교다.
막 대학 졸업한 청년을 불혹 문턱까지 데려다 놓은 10년이란 세월, 언뜻 듣기에 생소한 ‘가정형 대안학교’ 선생님으로 살아온 홍현우 씨, 그의 삶과 일 이야기이다.
서정필(이하 서) : 지난 번 방문 때보다 학교가 더 좋아졌어요. 그 때는 막 이사 온 느낌이 아직 가시지 않았었는데, 조명도 책 보기 편하게 여러 개 달려있고 대형 서점에 있는 것처럼 넓은 책상도 있고요.
홍현우(이하 홍) : 예, 신경 좀 썼습니다.(웃음) 여기는 아이들이 편하게 책 보고 만화책도 보고 하는 공간입니다.
뭘 하고 싶은 게 없던 학창시절을 지나
스물일곱 살 햇병아리 교사 홍현우 씨는 이제 10년차 대안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서 :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홍 : 전라북도 군산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께서 선주(船主)셨거든요. 거기서 일곱 살까지 살았는데 어릴 때 기억은 친구들이랑 바닷가에서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어딘가 쓰레기 더미 쌓아놓은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많이 놀았어요.
그런데 일곱 살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도망치듯 서울로 이사했지요. 초등학교 때까진 아무래도 지방 출신이라 기를 못 펴고 살았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원래 가지고 있던 쾌활함을 되찾았어요. 공부는 잘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고요. 살던 곳이 신월동이었는데 그렇게 잘 사는 동네가 아니다보니, 공부를 막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일반고에 진학한 이유를 물으니 형이 가기에 가고 싶었다 하고, 대학 전공도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과 상의 끝에 장학금 받을 수 있는 곳을 골랐다고 한다. 그런데 집 떠나 혼자 살게 되어 그랬는지, 방황이었는지 입학 후 성적은 바닥이었다.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던 시절’로 그 때를 떠올렸다.
홍 :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대학 입학하느라 내려가 있을 때, 살던 전셋집 보증금을 빼서 빚 갚고 나머지 식구들은 교회에 살았어요. 그런 사정이다 보니 한 번에 두 명 대학 등록금 대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네 살 많은 형이 전역하면서 제가 자동으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시작하게 된 군대생활이 홍 선생님에겐 터닝 포인트가 된다.
홍 : 제 인생에서 군대가 모든 것을 다 바꿔놓았어요. 그런 분들이 많겠지만 저는 특히 더 그랬어요. 제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모두 다 군대에서 깨달았어요. 답을 얻었다고나 할까요? ‘사람과 함께 살아야겠다, 사람 속에서 살아야겠다’고 정하게 되었어요.
서 : 군대와 사람, 잘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해요.
홍 : 부대가 작았어요. 워낙 인원이 적은 데다가 훈련 차출 인원, 휴가자 합치면 보통 부대에 남아있는 인원이 100명이 채 안 됩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보초를 서다 보니 두 달에 한 번씩은 보는 것 같아요.
근데 보통 그냥 가만히 있거나 대화를 해도 여자 사귀어 본 이야기 정도 하거든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인생에서 가장 파릇파릇한 때에 많아야 두 세 살차 나는 남자 둘이서 그렇지 않아요?
너는 어떤 사람이야?
"‘너는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묻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홍 : 그 때부터 ‘너는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묻기 시작했어요.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다가 입대했는지 그냥 그런 거 물어봤어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다들 사연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그래요. ‘사람’ 두 글자가 심장에 딱 박혔지요. 사람 만나서 대화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지 몰랐어요. 제 적성을 군대에서 찾은 거죠.
제가 예배 찬양인도도 했는데 그 때마다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어요. 계급이 높지도 않고 특출한 능력도 없지만 제 영역이 생기더라고요. 부대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저부터 찾고, 또 후임들이 고민 있을 때도 저를 찾았어요. 내가 이곳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둠 속에 무장한 군인 두 명, 가장 대화가 힘들 것 같은 그 공간 속에서 홍 선생님은 ‘사람’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챙기고 다시 세우는 일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복학한 뒤 홍 선생님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청소년지도학과 사무실이었다.
홍 : 2003년 즈음이었는데 ‘청소년’에 대한 개념이 사회적으로 잡히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청소년 상담사라는 직업도 생기고 10대를 입시 준비하는 존재로만 보지 말자는 흐름이 형성되던 시기였어요. 보초 서면서 들은 것이 바로 후임들 10대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사람들과 함께, 사람을 챙기면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고민하고 있는데 ‘청소년 지도학’ 이라는 전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복수전공하느라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빽빽한 시간표 속에서 씨름하길 2년, 졸업장 속에는 청소년 지도학 학위가 새겨졌다. 사회로 나갈 준비가 끝난 것이다.
자신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홍 : 졸업하니까 스물여섯이더라고요. 원래 손 벌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집안 사정이어서 제가 밥벌이를 해야 했지요.
서 : 불안하지는 않으셨어요?
홍 : 그렇지는 않았어요. 군대 생활에서부터 쌓아온 자신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하면 내 영역이 생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 제 몫을 할 기회가 온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처음부터 대안학교 교사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일반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청소년 문화센터 문을 두드려 보기도, 대안교육센터(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를 찾기도 했다. 또 쉼터에서 거리 상담을 하던 시절도 있다.
홍 : 문화센터도, 쉼터에서 한 거리 상담도 그렇고 뭔가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리고 찾은 게 대안교육센터입니다. 거기서 실제 대안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과정을 밟고 나서 대안학교 교사모집에 지원해서 일하게 되었어요.
꿈터에서 보낸 10년
"저희가 아무리 잘 다독이고 가르치고 해도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돌아가서 그대로가 되어 버려요."
서 : 꿈터에서 10년을 보내셨는데요. 선생님께서 느끼실 때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홍 : ‘자립심’이지요. 자기주도 ‘학습’은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아이들이 자립심을 실제로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요. 또 자유가 왔을 때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요. 자유와 방종이 구분이 안 되는 거지요. 입시 준비 하다가 대학을 가거나 다른 진로를 선택하거나 갑자기 생긴 자유를 제대로 쓸 줄 모르니 방황의 시간이 길어지지요.
서 :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지요?
홍 :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이거든요. 부모가 바뀌지 않는데 아이만 바뀔 수가 없어요. 저희가 아무리 잘 다독이고 가르치고 해도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돌아가서 그대로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어떤 때는 아이가 졸업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정말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부모님들 중 일부이지만, 이 학교를 ‘위탁’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기관으로 생각할 때 많이 힘들어요.
꿈터학교가 만들어진 취지에 동감하고 아이들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는 동료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들 중에는 그냥 단지 교육서비스를 해준 사람으로만 저희를 대할 때 마음이 아프지요. 그 때가 가장 힘들어요. 저희는 단순히 대가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서 : 10년 동안 많은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 텐데요. ‘내가 이 아이는 참 잘 가르쳤구나’하고 판단하게 되는 기준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홍 : 그게 많이 바뀌었어요. 초창기에는 검정고시 응시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러니까 결손이 생긴 부분을 빨리 정상화 시켜서 보통 학교로 돌려보내려고 했고 그게 성공하면 제가 잘한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 않겠다는 아이들까지 검정고시 준비를 시키니 역효과가 나더라고요. 동기부여가 안 된 상태에서 하다 보니 갈등도 많이 생기지요.
‘검정고시’ 대신 ‘공동체’
홍 : ‘검정고시’가 있던 자리는 ‘함께’ 라는 단어가 대체됐어요. 요즘 아이들 정말 이기적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있는 동안 ‘함께, 뭐든지 함께’ 하자고 해요. 길어야 3,4년인데 여기서만큼은 함께 하는 버릇을 들이자고 하지요.
사실 여기 온 아이들 보면 사회에서 일단, 한 번 밀려난 사람들이예요. ‘경쟁’ 논리로는 세상에서 버틸 수가 없어요. 물론 아이들 잘못은 아니지만 현실이에요. 또 요새 애들은 이미 다 알아요. 그래서 저희는 아이들에게 1대1로 세상과 경쟁하라고 하기보다는 뭔가를 함께 해본 경험을 가지게 해요.
우리 아이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내세울 것 없는 것 같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희 아이들이 개인전에는 약할지 몰라도 단체전에는 강하거든요. 그런데 사회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 아이들 힘은 ‘함께’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마치며 홍현우 선생님 본인의 꿈에 대해 물었다. 그동안 경험을 담은 ‘제2의 꿈터’를 만들고 싶다 했다. 교장 배영길 선생님께 배울 것이 남아있어서 아직은 아니지만, 훗날 지금의 경험을 토대로 디자인한 학교를 꼭 열고 싶다고 한다. 그 학교가 문을 여는 날, 꼭 초대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집 아니, 학교를 나섰다. ‘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을 또 한 명 발견했다.
“선생님은 얼마나 있을 거예요?”
“응 오래 있어야지. 가능한 한 오래 있을 거야.”
“치... 처음엔 다들 그랬어요.”
“지금까지 가장 오래 계신 분이 얼마나 계셨는데?”
“8개월이오. 가장 오래 계신 분이 8개월 계셨어요.”
“그래...? 그럼 난 9개월은 있을게.”
그 9개월이 120개월이 되었다. 당시 스물일곱 햇병아리 교사 홍현우 씨는 이제 10년차 대안학교 선생님이다. 그가 일하는 꿈터학교는 가정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찜해 놓고 사랑하자’는 모토 아래 함께 살면서 배우는 가정형 대안학교다. 아이들에게 홍현우 선생님은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님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다. 서울 암사동에 있는 꿈터학교는 일반 가정집을 교사(敎舍)로 쓰고 있어 대문에 달린 간판이 아니었다면 다른 집과 구별 되지 않는다. 꿈터학교는 집이며 또한 학교다.
막 대학 졸업한 청년을 불혹 문턱까지 데려다 놓은 10년이란 세월, 언뜻 듣기에 생소한 ‘가정형 대안학교’ 선생님으로 살아온 홍현우 씨, 그의 삶과 일 이야기이다.
서정필(이하 서) : 지난 번 방문 때보다 학교가 더 좋아졌어요. 그 때는 막 이사 온 느낌이 아직 가시지 않았었는데, 조명도 책 보기 편하게 여러 개 달려있고 대형 서점에 있는 것처럼 넓은 책상도 있고요.
홍현우(이하 홍) : 예, 신경 좀 썼습니다.(웃음) 여기는 아이들이 편하게 책 보고 만화책도 보고 하는 공간입니다.
스물일곱 살 햇병아리 교사 홍현우 씨는 이제 10년차 대안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서 :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홍 : 전라북도 군산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께서 선주(船主)셨거든요. 거기서 일곱 살까지 살았는데 어릴 때 기억은 친구들이랑 바닷가에서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어딘가 쓰레기 더미 쌓아놓은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많이 놀았어요.
그런데 일곱 살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도망치듯 서울로 이사했지요. 초등학교 때까진 아무래도 지방 출신이라 기를 못 펴고 살았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원래 가지고 있던 쾌활함을 되찾았어요. 공부는 잘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고요. 살던 곳이 신월동이었는데 그렇게 잘 사는 동네가 아니다보니, 공부를 막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일반고에 진학한 이유를 물으니 형이 가기에 가고 싶었다 하고, 대학 전공도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과 상의 끝에 장학금 받을 수 있는 곳을 골랐다고 한다. 그런데 집 떠나 혼자 살게 되어 그랬는지, 방황이었는지 입학 후 성적은 바닥이었다.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던 시절’로 그 때를 떠올렸다.
홍 :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대학 입학하느라 내려가 있을 때, 살던 전셋집 보증금을 빼서 빚 갚고 나머지 식구들은 교회에 살았어요. 그런 사정이다 보니 한 번에 두 명 대학 등록금 대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네 살 많은 형이 전역하면서 제가 자동으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시작하게 된 군대생활이 홍 선생님에겐 터닝 포인트가 된다.
홍 : 제 인생에서 군대가 모든 것을 다 바꿔놓았어요. 그런 분들이 많겠지만 저는 특히 더 그랬어요. 제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모두 다 군대에서 깨달았어요. 답을 얻었다고나 할까요? ‘사람과 함께 살아야겠다, 사람 속에서 살아야겠다’고 정하게 되었어요.
서 : 군대와 사람, 잘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해요.
홍 : 부대가 작았어요. 워낙 인원이 적은 데다가 훈련 차출 인원, 휴가자 합치면 보통 부대에 남아있는 인원이 100명이 채 안 됩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보초를 서다 보니 두 달에 한 번씩은 보는 것 같아요.
근데 보통 그냥 가만히 있거나 대화를 해도 여자 사귀어 본 이야기 정도 하거든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인생에서 가장 파릇파릇한 때에 많아야 두 세 살차 나는 남자 둘이서 그렇지 않아요?
"‘너는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묻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홍 : 그 때부터 ‘너는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묻기 시작했어요.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다가 입대했는지 그냥 그런 거 물어봤어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다들 사연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그래요. ‘사람’ 두 글자가 심장에 딱 박혔지요. 사람 만나서 대화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지 몰랐어요. 제 적성을 군대에서 찾은 거죠.
제가 예배 찬양인도도 했는데 그 때마다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어요. 계급이 높지도 않고 특출한 능력도 없지만 제 영역이 생기더라고요. 부대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저부터 찾고, 또 후임들이 고민 있을 때도 저를 찾았어요. 내가 이곳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둠 속에 무장한 군인 두 명, 가장 대화가 힘들 것 같은 그 공간 속에서 홍 선생님은 ‘사람’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챙기고 다시 세우는 일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복학한 뒤 홍 선생님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청소년지도학과 사무실이었다.
홍 : 2003년 즈음이었는데 ‘청소년’에 대한 개념이 사회적으로 잡히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청소년 상담사라는 직업도 생기고 10대를 입시 준비하는 존재로만 보지 말자는 흐름이 형성되던 시기였어요. 보초 서면서 들은 것이 바로 후임들 10대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사람들과 함께, 사람을 챙기면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고민하고 있는데 ‘청소년 지도학’ 이라는 전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복수전공하느라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빽빽한 시간표 속에서 씨름하길 2년, 졸업장 속에는 청소년 지도학 학위가 새겨졌다. 사회로 나갈 준비가 끝난 것이다.
홍 : 졸업하니까 스물여섯이더라고요. 원래 손 벌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집안 사정이어서 제가 밥벌이를 해야 했지요.
서 : 불안하지는 않으셨어요?
홍 : 그렇지는 않았어요. 군대 생활에서부터 쌓아온 자신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하면 내 영역이 생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 제 몫을 할 기회가 온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처음부터 대안학교 교사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일반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청소년 문화센터 문을 두드려 보기도, 대안교육센터(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를 찾기도 했다. 또 쉼터에서 거리 상담을 하던 시절도 있다.
홍 : 문화센터도, 쉼터에서 한 거리 상담도 그렇고 뭔가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리고 찾은 게 대안교육센터입니다. 거기서 실제 대안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과정을 밟고 나서 대안학교 교사모집에 지원해서 일하게 되었어요.
"저희가 아무리 잘 다독이고 가르치고 해도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돌아가서 그대로가 되어 버려요."
서 : 꿈터에서 10년을 보내셨는데요. 선생님께서 느끼실 때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홍 : ‘자립심’이지요. 자기주도 ‘학습’은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아이들이 자립심을 실제로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요. 또 자유가 왔을 때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요. 자유와 방종이 구분이 안 되는 거지요. 입시 준비 하다가 대학을 가거나 다른 진로를 선택하거나 갑자기 생긴 자유를 제대로 쓸 줄 모르니 방황의 시간이 길어지지요.
서 :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지요?
홍 :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이거든요. 부모가 바뀌지 않는데 아이만 바뀔 수가 없어요. 저희가 아무리 잘 다독이고 가르치고 해도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돌아가서 그대로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어떤 때는 아이가 졸업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정말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부모님들 중 일부이지만, 이 학교를 ‘위탁’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기관으로 생각할 때 많이 힘들어요.
꿈터학교가 만들어진 취지에 동감하고 아이들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는 동료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들 중에는 그냥 단지 교육서비스를 해준 사람으로만 저희를 대할 때 마음이 아프지요. 그 때가 가장 힘들어요. 저희는 단순히 대가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서 : 10년 동안 많은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 텐데요. ‘내가 이 아이는 참 잘 가르쳤구나’하고 판단하게 되는 기준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홍 : 그게 많이 바뀌었어요. 초창기에는 검정고시 응시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러니까 결손이 생긴 부분을 빨리 정상화 시켜서 보통 학교로 돌려보내려고 했고 그게 성공하면 제가 잘한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 않겠다는 아이들까지 검정고시 준비를 시키니 역효과가 나더라고요. 동기부여가 안 된 상태에서 하다 보니 갈등도 많이 생기지요.
홍 : ‘검정고시’가 있던 자리는 ‘함께’ 라는 단어가 대체됐어요. 요즘 아이들 정말 이기적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있는 동안 ‘함께, 뭐든지 함께’ 하자고 해요. 길어야 3,4년인데 여기서만큼은 함께 하는 버릇을 들이자고 하지요.
사실 여기 온 아이들 보면 사회에서 일단, 한 번 밀려난 사람들이예요. ‘경쟁’ 논리로는 세상에서 버틸 수가 없어요. 물론 아이들 잘못은 아니지만 현실이에요. 또 요새 애들은 이미 다 알아요. 그래서 저희는 아이들에게 1대1로 세상과 경쟁하라고 하기보다는 뭔가를 함께 해본 경험을 가지게 해요.
우리 아이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내세울 것 없는 것 같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희 아이들이 개인전에는 약할지 몰라도 단체전에는 강하거든요. 그런데 사회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 아이들 힘은 ‘함께’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마치며 홍현우 선생님 본인의 꿈에 대해 물었다. 그동안 경험을 담은 ‘제2의 꿈터’를 만들고 싶다 했다. 교장 배영길 선생님께 배울 것이 남아있어서 아직은 아니지만, 훗날 지금의 경험을 토대로 디자인한 학교를 꼭 열고 싶다고 한다. 그 학교가 문을 여는 날, 꼭 초대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집 아니, 학교를 나섰다. ‘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을 또 한 명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