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노워리[정책편지]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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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지금 처한 경제적 위치, 직업 등이 자신의 노력과 실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시나요? 분명, 노력으로 이뤄진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어떤 일의 결과에는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편지 제목은 이러한 연구결과를 담은 로버트 H.프랭크(코넬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의 책 제목에서 인용해봤어요. 
 
2021년, 능력주의 논쟁이 뜨겁습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쓴 소설에서 처음 나온 말입니다. 소설 속 미래사회는 메리트 즉, 지능과 노력에 따라 사회자원이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사회에는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피지배계급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특권은 능력주의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 탓이지, 사회구조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능력주의의 핵심입니다. 
 
불공정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는 절차적 공정성을 담보하는 능력주의만큼은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부터, 견고한 사회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지난 11월 9일, ‘2022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상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14명의 전문가와 함께 특별 포럼을 열었습니다. 오늘 정책편지에서는 이 포럼에서 나눈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사진] '능력주의는 폭군이다'는 주제로 강연하는 김누리 교수
기조강연에 나선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어독문학과)는 지난 100년간 우리교육의 목표가 일제강점기, 군부독재,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황국신민, 반공투사, 인적자원으로 달라졌을 뿐, 경쟁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는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독일이 1970년대에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고 선언하며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천하고 오늘날, 가장 도덕적인 정치공동체로 인정받듯, 우리 교육도 능력주의의 폭압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소득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출신과 성장배경
제1세션에서는 능력주의가 가리고 있는 불평등을 짚어보았습니다. 발제를 맡은 주병기 교수(서울대 경제학과)는 ‘개천용 기회불평등 지수’가 1997년 IMF 이전 4년 평균 17.96%에서 2013-2016년까지 평균 39.52%로 약 2배로 악화된 연구 결과를 보여줍니다. 특히 학력만 비교했을 때 4배 가까이 악화됐습니다. 교육에서 나타난 기회불평등이 노동으로 이어지며 계층 이동을 구조적으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자료로 입증한 것입니다. 
 
능력주의는 절차적 공정성을 갖고 있으나,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므로 실질적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공정이 작동하려면 각 경제주체들의 힘의 배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공 사다리가 놓여있지 않은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맡겨버리면, 승자독식을 해결하기란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김현철 교수(홍콩과학기술대학 경제학과 및 정책학과)는 능력주의 사회의 보상이 능력에 달렸다는 건 명백히 오산이라고 말합니다. 소득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출신과 성장배경이라는 것이죠. ‘태어난 나라가 평생 소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미 경제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부모의 유전자’가 소득의 30%를 설명합니다. 아래 [표1]은 양육환경이 동일하더라도 부모와 입양자녀, 친자녀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부모의 유전적 요인이 교육과 소득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일대학의 세스 짐머만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명문대에 아슬아슬하게 합격한 집단과 아슬아슬한 탈락자들 사이에 고소득자가 될 확률은 2-3배 차이가 납니다. 고소득자가 모두 남자이며, 사립명문고 출신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충격적입니다.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좋은 일자리 창출을 늘리는 것입니다. 특히, 교육 불평등 해소는 초중고보다는 저소득층 가정의 영유아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눈에 띕니다. 영유아부터 직업교육까지 평생 인적 자본을 연구한 노벨경제학 수상자 해크만 교수는 임신기 및 아동에 대한 초기 투자가 직업교육과 같은 성인기 투자에 비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불우한 어린시절이 불평등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좋은 시민이 된 다음의 일
십여 년간 교사로 일한 박은선 변호사는 점수별 줄세우기를 능력주의로 오해하는 흐름을 지적하며, 고등교육권을 보장하는 교육사회가 되지 않으면, 어떤 개혁적인 정책도 무용지물임을 강도 높게 주장합니다. 그가 인용한 에르끼 아호(핀란드 전 국가교육청장)의 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경쟁은 경쟁을 낳아 유치원생까지 경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될 것입니다. 학교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양을 쌓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경쟁은 좋은 시민이 된 다음의 일입니다.” 
 
울산에서 온 김춘희 학부모는 재난지원금을 못 받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어린 아이, 공부 못하는 애와 왜 어울리냐고 면박을 주는 교사, SKY출신 우대를 당연하다 여기는 지방대생들, 불평등과 차별이 내면화된 우리의 스산한 모습을 들려주었습니다. 성적으로 줄 세워진 좌표가 네가 아니라는 간곡한 호소야말로 유튜브로 시청하는 많은 이들에게 먹먹한 울림으로 전해졌습니다. 
 
능력주의 산실이 된 학교
제2세션은 ‘능력주의의 산실이 된 시험과 학교’를 주제로 논의가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시험인간>을 공동집필한 장근영 선임연구위원(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제를 맡아, 시험 중독에 빠진 우리 사회 메커니즘을 통찰했는데요.
 
우리나라 사람들 삶의 대부분은 고부담시험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특히, 중요 시험들은 중독의 특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습니다. 시험을 통해 자격을 판단하는 세상에서 성장한 개인은 시험을 세상의 원리로 내면화하고, 차별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또, 시험을 제외한 나머지는 ‘부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도 여기에서 확고해지는 것이죠. 시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획득했으므로, 차별을 통해 사회적 지위 격차를 정당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조직에선 직원 채용 시 인턴 같은 비정규직을 채용 후보로 삼습니다. 이들은 이미 회사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므로 고용주가 수행능력, 적성, 인성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 이들을 채용하는 것은 빠르고 효율적입니다. 오히려 공채 같은 시험은 정보가 불확실하고 상당한 비용까지 듭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공채를 통과한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합니다. 어차피 사회 불평등이 없어지지 않을 테니 시험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관점은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할뿐 아니라 우리 삶을 현상유지하려다 퇴보하게 만듭니다. 
N수 권하는 사회
엄수정 부연구위원(경기도교육연구원)은 수능 응시자는 해마다 줄어드는데, N수생 즉, 졸업생 비율이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는 현상에 주목합니다. 2019년에 22.8%, 2020학년도엔 25.9%, 2021학년도에는 27%로 역대 최고치입니다. 특히 이들 지역이 서울과 수도권, 특히 강남권에 몰려 있습니다. N수야말로 능력주의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N수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전경원 교육정책자문관(경기도청)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가 ‘격차’에 둔감한 사회를 만들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지난 3년간, 서울대 정시합격자가 강남구 출신은 평균 347명인데, 4대 광역시를 합해도 325명이라는 결과 앞에서 학벌이 개인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권하경 학생은 “고3은 행복하면 안되는 걸까요?”라고 질문합니다. 2021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9년째 자살이고, 4명 중 1명이 우울감을 경험하며, 청소년 고민 중 학업이 46.5%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성적이라는 무기로 전쟁처럼 학업을 이어나가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을 돌려달라는 요구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요?

능력주의를 넘어서
마지막 제3세션에서는 능력주의가 낳은 교육불평등을 해소할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발제를 맡은 구본창 정책국장은 사회 계층에 따른 특권이 교육을 통해 대물림되는 현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줬습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선발을 통과한 소수가 과도한 혜택을 누리면서, 특권트랙으로 작동한지 오래입니다. 반일제 유아대상 영어학원-사립초-국제중-특목고-sky-전문직·대기업으로 이어지고, 한 단계를 넘을 때마다 부모의 경제력과 아동의 살인적인 학습노동이 수반됩니다.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연간 비용이 대학등록금 2배에 달하고, 전국단위 자사고와 영재학교 신입생 10명 중 7명이 수도권 출신이며, 그중에서도 사교육 과열지역에 쏠려 있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국내 의대에 다니는 학생 절반 이상이 가구소득 9,10분위에 해당하는 고소득층 자녀라는 사실도 충격적입니다. SKY 재학생도 9,10분위가 40%를 넘습니다. SKY 출신은 국회, 사법부, 행정부 요직 인사들의 50~70%를 차지합니다. 결국, 부모 배경은 교육제도 내 특권 트랙을 타고, 직업세계에 안착해 소득불평등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대안은 이미 충분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올해 초, 교육불평등 해소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교육불평등을 해소하려면 보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체계적인 지표와 지수가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진단과 연구, 계획을 실행하여 불평등을 해결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시스템을 법제화하자는 내용입니다. 또한 학생을 공동선발하는 대학들에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서 교육의 질을 올리는 것은 물론 대학서열이 해소되면, 능력주의로 점철된 입시경쟁은 훨씬 완화될 것입니다.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지역인재 의무채용법 등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과 아이디어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일찍이 능력주의 교육의 폐해를 피력해온 장은주 교수(영산대 성심교양대학)는 다양한 층위에서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를 확대해 모든 계층의 학생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부여하자고 말합니다. 김영식 공동대표(좋은교사운동)는 대입에서 성인학습자 전형을 제안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3년이 지난 뒤 이 전형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면 고교교육과 입시가 분리되면서, 고교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는 물론, 졸업 이후에 다양한 삶의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는 구상입니다. 
 
노력으로 바꿀 것이 협소해진 탓에 서열 매기기 시험만이 청년들의 동아줄로 남았다는 이서연 활동가(출신학교차별금지법 청년액션)의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능력주의가 완벽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절차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려는 절박함이 능력주의를 더 옹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능력주의는 결정적 시험을 근거로 더 큰 이득을 얻으려는 지대추구현상에 빠지게 되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이면을 들여다보자고 제안합니다.  
[사진] 교육불평등 해소 대안을 발표하는 구본창 정책국장
포럼에 참여한 모든 발표자와 100여 명의 시청자들 모두 한 목소리로 능력주의 안에 숨겨진 교육 격차와 불평등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안한 대안들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정책이 입안되어야 합니다. 2022년 대선 후보 중 어느 누가 능력주의로 심화되는 교육 불평등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전쟁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시 내 자신과 아이들을 채찍질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날 나눈 논의들은 캄캄한 현실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들이 나의 노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 이들이 더 많아진다면, 이들의 의사결정은 분명 다를 테니까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논의가 확산되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계획입니다. 
선생님도 여기에 계속 귀 기울여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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